-
집에 큰 불이 났었다. 하지만 백씨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녀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고, 영등포 살던 때의 일이라고, 어른들이 일러주어서 알고 있을 뿐이다. 그 화재 때문에 그녀의 가족은 성남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 또한 전해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당시 월세방도 얻기 힘들었데요 영등포에. 근데 성남에 오니까 집 한 채 값이 되더래요. 월세 값도 안됐는데 그 돈이...
-
백씨는 숭신여중을 거쳐 숭신여고를 다녔다. 집이 있는 태평동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은 산길이었다. 초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길이었지만, 가끔씩은 무서운 곳이기도 했다. “그 길이 지금도 아주 생생해요. 뒷길이 다 산길이었어요. 사고도 많이 보고 사람도 죽고, (거기서요) 예. (어쩌다가 사람이 죽어요) 그때 당시 어렸을 때 충격 먹은 게, 무슨 쫓아갔는데 살인 사건이래요. 뭘...
-
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에서 석유가게를 운영했다. 남편은 착하고 성실했으며, 석유가게는 굉장히 잘 되었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석유 배달을 했고, 그런 덕분에 돈을 꽤 모았다. 그러다가 남편은 다른 사업을 해보겠다고 했고, 어느 날 갑자기 새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석유장사 해서 모았던 1억 6천만 원을 불과 6개월 만에 송두리째 날려버렸다....
-
백씨는 꽃꽂이 강사를 하고 있었다. 몇 군데 강의를 나가면 적지 않은 강의료가 들어왔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강의료는 고스란히 남편의 카드빚을 갚는 데 들어갔다. 그런데도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은 집에 차압(압류)이 들어오기에 이르렀다. “그래갖고 집에 차압까지. 처음 봤어요, 진짜 남자들이 와가지고. 그때 당시 차압이 들어올려 하는데 딱 들고 나갔죠. 애기 아...
-
백씨는 포장마차를 시작했다. 남편의 석유가게 앞에서 튀김 같은 간식거리를 파는 장사였다. 사실 수익도 수익이지만, 포장마차를 차린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을 가까이서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가게에 드나드는 놀음꾼들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지 않으면 남편의 놀음 습관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물론 빚도 갚아야 했다. 그래서 소중하게 키워오던, 꽃꽂이에 대한 꿈을 접어 버렸다....
-
몰락해 가는 가정과 남편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친구를 만나는 일도 삼갔다. 아니 차비를 걱정할 만큼 사정이 안 좋아 친구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그녀는 함주부[함께하는 주부모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함주부를 통해 봉사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자신에게 닥친 최악의 상황이 자기만큼이나 힘겨운 사람들의 삶을 돌아보도록 해 주...
-
어떤 할머니들은 전혀 거동을 못했다. 그러다 보니까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할머니들 대소변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경우도 생겼다. 아무리 봉사가 좋다고 한들 대소변을 받아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너무 역겹기까지 했다. 그래도 할머니들의 삶의 자리를 휘 둘러보면 생겨나는 짠한 마음이 그녀를 그냥 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귀가 안 들리는 할머니하고 장애를 갖고 있는 딸이 같...
-
석유가게 앞 포차에 오는 손님 중에는 어린 아이도 많았다. 그중에는 포차에서 파는 튀김으로 끼니를 때우는 아이도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아이의 아빠는 허리 디스크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아빠가 그녀의 포장마차를 찾아왔다. “처음에 저한테 왔드라고. 한달치를 드릴 테니까 아이들의 간식을 이걸로 줄 수 없녜. 너무 가슴이 아프더라구요. 엄마도 없고 그런 상...
-
백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마음이 복잡했다. 자신을 낳아 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니 생모가 따로 있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몰랐다. 그러다가 사춘기에 들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끝내 몰랐더라면 어땠을까? “사춘기 때 동네 사람들이, 인제 니네 엄마 새엄마다,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저는 아니다 우리 엄마다. 어머님이 좀 쎄셨어요. 그러다 보니까...
-
백씨는 남편을 만나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호적을 정리하면서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다시 알게 되었다. 생모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도 줄곧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에, 생모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집에서는 생모의 행방을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경찰서에 생모를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부탁해 보았지만, 서민의 아픔을 하나 하나 어루만지기에...
-
백씨는 상대원에서 18년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생모를 찾았고 아이를 출산했다. 신장이 좋지 않았던 그녀는 요관 수술을 크게 받았다. 그런데 수술이 있은 지 일년 만에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다. 결혼한 지 7년 만의 일이었다. 거의 포기한 상태에서 들어선 아이는 너무 소중한 존재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건강한 사람도 아이를 가지면 심장이 눌리니까 힘든데, 저는 잘못하면 수술자...
-
그녀의 남편은 상대원1동에 자신의 석유가게를 내고 7년 간 운영했다. 그리고 잠깐의 외도(당구장 사업) 후에 상대원3동으로 옮겼다. 그 후로 지금까지 장장 9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4년도에 결혼을 했는데, 그 직후만 해도 석유가게의 석유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남편과 두 명의 기사들이 배달을 나가면, 그녀는 가게로 석유를 사러 오는 사람들을 상대했다. 손님들은 줄을 서서...
-
착실하게 석유가게를 운영하던 남편은, 군에서 제대한 조카의 꾐에 넘어가 대학가 앞에 당구장을 열었다. 처음에 당구장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녀는 극구 반대했다. 그냥 몸으로 벌어먹던 사람이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당구장을 잘 운영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생들을 상대로 당구장을 운영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뭐랄까, 대학생들 저는 좀 실망을 했던 게, 저희가...
-
석유가게를 접은 지 그럭저럭 1년이 지났을 때, 백씨의 남편은 상대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석유가게를 냈다. 원래 남편은 서울 마포 사람이었다. 총각 때 누나(지금의 시누이)를 쫓아 성남으로 왔다. 그리고 상대원 최초의 석유가게였던 대원석유에서 직원으로, 소장으로 일했었다. 총각 때부터 해오던 일이라 우선 시작하기는 쉬웠다. 석유는 전화 장사였기 때문에 고정 고객 확보가 중요했다. 그...
-
백씨는 90년인가 어느 날 평화방송에서 꽃꽂이 강좌를 보다가 그것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처녀 시절에 아트 플라워와 분재를 배우던 취미가 꽃꽂이로 이어졌다. 좋은 선생을 찾아 월 수강료 70만원을 투자하였다. 전시회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그리고 사범자격증도 땄고, 강의를 하기도 했다. 백씨는 다른 지역에서 꽃꽂이 강의를 하면서 상대원에도 꽃꽂이를 보급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따로...
-
삶을 살아가면서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실 현재가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겁도 없이 일수를 얻어 포장마차를 차렸던 때를 생각하면 아쉬움보다는 무서운 감정이 몰려든다. 남편의 사채 빚이 점차 늘어갔고, 가깝던 친척들이 다들 멀어져갔을 때, 백씨는 이를 악물어야 했다. “포장마차 맞추고 그릇 사고 하는데 130이 들더라고요. 그걸 시작을 하면서 일단은 빚은 갚아야 할...
-
백씨는 요즘 함주부[함께하는 주부 모임]가 운영하는 ‘책이랑도서관’에 상근한다. 상대원 소외지역 청소년들이 찾는 작은 문화공간을 소중하게 돌보고 가꾸는 일이 그녀는 마음에 든다. 그리고 함주부 일을 하면서 상대원에서 벌어지는 문화 프로젝트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2008년 들어 성남문화재단이 문화예술을 통해서 상대원시장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문화 프로젝트 중에는, 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