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1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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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仙甘島-沙工 |
영어의미역 | A Feryyman of Seongamdo Island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현우 |
[정의]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에서 사공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선감도 나룻배 사공」은 일제강점기에 선감도 나룻배 사공 박신태[곰보사공]와 관련된 민담이다. 즉 창씨개명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갈등을 김완수·윤기은·박신태 등의 의견을 중심으로 서사 형태로 진행하는 애국담이다.
[채록/수집상황]
1997년 이현우가 선감도로 현지조사를 나가 주민 김동열[남, 69]로부터 채록하였는데, 이는 2002년 안산문화원에서 발간한 『대부도향리지』에 실려 있다.
[내용]
선감도 북단과 마주하고 있는 대부도의 갯골은 물살이 세고 간만의 차가 심해서 나룻배를 이용해야만 했다. 옛날부터 나룻배 사공이 많았지만 이 이야기는 박신태 뱃사공 이야기로부터 비롯된다. 박신태 사공은 그날그날 대부도와 선감도에서 잡은 어물이라든가 곡물 등을 실어다 주며 비교적 넉넉하게 살았다.
나룻배 삯으로 현물을 많이 받던 때라 집의 찬거리도 넉넉했고, 특히 그는 술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쉬는 때에는 거나하게 취하기 일쑤였다. 맛을 잡은 아낙네는 맛을 주고, 굴을 따는 아주머니는 생굴을 나룻배 삯으로 주었는데 절반은 절이고도 남아 술안주로 족했다.
박 사공은 물살이 셀 때는 노 젓기가 힘들어 고생을 많이 했으나 워낙 몸이 튼튼해 이를 잘 견디었고 곧잘 흥겹게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가진 것 없는 노총각 사공이었고, 또 돌림병인 마마[천연두]로 얼굴이 얽었으며, 왼손잡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곰보사공이라고 불렀다. 곰보사공은 고향이 영흥도라고 했다. 그곳에서 소년 시절에 부모를 여의고 대부도로 옮겨와 방아머리에서 날품을 팔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입이 일정치 않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선감도로 옮겨와 초가집을 짓고 정착했다고 한다.
대부도 사람들은 육지로 드나들 때마다 곰보사공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섬사람들이긴 하지만 배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곰보사공은 사시사철 나룻배를 저어 생활하였는데 이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사리 때는 힘이 더 들었다. 또한 겨울이면 왕래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초가집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는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는데 특히 즐겨 부르는 노래는 「뱃노래」와 「청춘가」 등의 노랫가락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날 곱게 길러서/ 요런 고생을 왜 시키시나요/ 날 데려가세요 날 데려가세요/ 정든 내 사랑아 날 데려가세요/ 사람마다 벼슬하면은 어부될 사람 어디 있고/ 의사마다 병 고친다면 북망산천이 왜 생겼나/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요만하면 만족할까.” 이러한 노랫말은 곰보사공의 철학이요 인생관이었다. 원망과 한탄, 그러나 현실에 만족하는 생활관은 몸소 겪어온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섬에까지 일제의 압력이 밀고 들어오는 1940년대 초, 일제는 한국 사람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창씨개명이란 예컨대 박(朴)씨는 ‘기무라’, 이(李)씨는 ‘구니모도’라 부르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게 하는 조치였다. 그 당시 대부면장은 김완수였는데, 이와 같은 행정조치를 윤기은이란 사람에게 주지시키는 것을 곰보사공은 덤덤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곰보사공 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셔 감정이 솟구칠 대로 솟구쳐 있었다. 그런데 윤기은이 박신태 사공에게 물었다. “자네, 창씨개명을 하면 좋겠나?” “창씨개명이 무엇이유?” “자네 이름과 성을 일본놈 식으로 고친다는 것일세.” 박신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유. 밥 많이 먹고 술만 있으면 족하지요.” 윤기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에이, 이 개만도 못한 놈!” “내가 개라구요? 천만에, 천만에 말씀을…….”
윤기은은 선감도 도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민족심이 강했다. 항일운동으로 고생한 선친의 영향도 받았지만 그보다도 자신의 인생관과 사명감이 투철한 청년이었다. 그러니까 무식하고 가정이 없는 박신태와는 대조적이었다. 윤기은 도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신태, 자네 술 취했나?” “아뇨, 저 멀쩡해요.” “멀쩡한 사람이 일본놈도 좋고 창씨개명도 괜찮단 말인가?” “사람은 다 매한가지라구요. 고생뿐인 인생인데 잘 살기만 하면…….”
윤 도수는 벌떡 일어나 박신태의 뺨을 내리쳤다. 이는 김완수 면장을 때려주고 싶은 충동이 엉뚱한 곳으로 분출된 것이었다. 박신태도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 윤 도수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김완수 면장이 둘 사이에 끼어들어 싸움은 일단 수그러졌다. 사실 박신태는 세상일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풍족하게 먹고 살기를 바랄 뿐 창씨개명에 따른 민족적 수치심이라든가 우국충정은 생각조차 못했다. 그만큼 박신태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완수 면장이 적당히 얼버무려 사태는 수습되었으나 윤기은 도수로부터 뺨을 맞은 박신태는 언젠가는 앙갚음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겨울날이었다. 그날따라 매우 바람이 세었고 물때가 나빴으나 윤기은 도수가 나룻배를 불렀다. 윤 도수는 대부면장 김완수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이었다. 술에 취한 박신태는 배 손님이 유독 한 사람뿐이라 잠시 지체하였다.
그때 윤 도수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빨리 좀 가야겠네!” 박신태는 아무 대꾸도 않고 뒤를 보러 갔다. ‘제 놈이 사람을 때려. 나두 어엿한 젊은이인데…….’ 그는 윤기은에 대한 묵은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그러나 뒤를 보고 오면서 생각해 보니 나라 일을 모르고 일본놈이 돼도 좋다는 자신의 말이 망발임을 깨닫게 되었다. 박신태는 천천히 나룻배를 저어 나갔다.
그런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 힘껏 저어 가던 노가 빠지면서 배가 딴 곳으로 흘렀다. 박신태는 술이 과했고, 배 또한 걷잡을 수가 없게 되자 윤 도수는 당황하여 두루마기를 벗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배는 여전히 다른 곳으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박신태가 소리쳤다. “윤 도수 양반, 저리 비켜요! 내가 누군데요. 이래봬도 십여 년 이 짓을 했다구요!” “신태 이 사람, 정신 차려!” 윤 도수는 겁에 질린 모습으로 노를 바로잡아 주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이 많으면 별 탈 없이 닻을 내리거나 힘을 모아 견딜 수가 있다. 그러나 단 둘뿐이고 당황한 탓에 한참만에야 배를 뭍에 댈 수가 있었다. 겨울철이지만 박신태도 윤도수도 땀에 젖었다. “신태, 오늘은 술이 과했어.” “그래요. 술, 술 때문이에요…….” “이 사람아, 술도 음식이니 알아서 해.” “네, 알았어유. 어서 다녀오세유.”
박신태는 윤 도수의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싶었으나 순간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해 뒤를 흐렸다. 그때 윤기은 도수가 말을 이었다. “여보게 신태, 자네 창씨 성은 기무랄세.” “뭐요, 기무라요? 그게 무슨 날벼락이유!” “아니 이 사람, 일본놈도 좋고 창씨개명도 좋다질 않았나.” “저 그땐 술이 그랬어요. 그리고 김 면장 꼴 좀 보자구 그랬던 거예요. 저도 비록 사공이지만 조상도 있고 나라도 있어유.”
윤 도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역시 박신태가 면장보단 낫구나.’ 그는 면사무소로 향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날 밤 박신태는 술에 흠뻑 취하였다. 박신태는 그후 장가도 들고 자식들을 낳아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현재 선감도의 나룻배는 없어지고 제방이 쌓여 육로로 변하였다.
[모티프 분석]
「선감도 나룻배 사공」의 주요 모티프는 ‘갈등을 유발한 창씨개명’이다. 일제강점기의 창씨개명과 관련된 이야기로, 선감도의 곰보사공 박신태가 윤기은에 의해 어리석음을 깨닫고 그동안 무심했던 애국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교훈담이다. 즉 무지한 뱃사공도 깨달아서 애국한다는 점을 강조한 이면에는 우리에게 매국이라는 못된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