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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500995
한자 金溶埰
영어음역 Gim Yongjin
이칭/별칭 성수,운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72[너비울길 147]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지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의료인
출신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 72[너비울길 147]지도보기
성별
생년 1891년연표보기
몰년 1931년연표보기
본관 김녕
대표경력 한성의사회 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안산 출신의 의료인.

[개설]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성수(性壽), 호는 운암(雲巖)이다. 1891년(고종 28) 지금의 안산시 단원구 화정동에서 아버지 김준성(金駿聲)과 어머니 순흥안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안산문묘(安山文廟) 직원 김교성(金敎聲)에게 양자로 갔다. 효자 김충주(金忠柱)의 13세손이며 오정각을 건립한 김처일(金處一)의 증손이다. 부인 송수려(宋水麗)와의 사이에 2남을 두었다. 묘는 단원구 화정동 너빌마을 성지골에 있다.

[활동사항]

김용채는 한학자인 양부(養父)에게서 한학을 깨우쳐 『시전(詩傳)』까지 익혔다. 총명하고 기억력이 뛰어나 양부의 권유로 14세에 상경하여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의학교에 입학, 1911년 27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졸업하였다. 21세 때 내과 교수인 미아 렌키치[森安連吉]에게 발탁되어 조선총독부 의원 겸 조수 통역생이 되었다. 1917년 일본 사람들과 공학(共學)으로 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 되었고, 2년 동안 단계적으로 임상을 거쳐 일본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에 1년간 유학하고 귀국하였다.

24세 되던 1919년 서울 관수동 청계천변에 진료소를 내고 김용채내과의원으로 개업해 우리나라 최초의 내과 의사가 되었다. 병원 문을 열자 환자가 쏟아져 개업한 지 1년여 만에 은행 빚을 모두 상환하였다. 한편 한성의사회 조직에 참여하여 한국 의사들의 단합을 꾀하였고, 제11대(1925), 제12대(1926) 회장을 역임하였다. 위암으로 1년여 동안 투병하다가 1931년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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