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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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友直 |
영어음역 | Yi Ujik |
이칭/별칭 | 중익(仲益),저로(樗老),문의공(文懿公),하관선생(何關先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익(仲益), 호는 저로(樗老). 아버지는 공조좌랑을 지낸 이사언(李士彦)이며, 어머니는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김국주(金國柱)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우직은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었고, 1558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뒤 박사, 전적, 어천찰방(魚川察訪), 교리 등을 거치고, 세 번이나 암행어사가 되어 수령들의 치정과 민심을 살폈다. 1567년(명종 22) 지평으로 있으면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부묘제를 거행하고 돌아오던 선조(宣祖)가 오랫동안 춤과 노래를 관람한 것을 지적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1571년(선조 4) 홍문관부수찬으로 재직 중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는 데 기사관(記事官)으로 참여하였다.
1573년(선조 6) 함경도 온성부사로 부임하여 청렴하고 검약에 바탕을 둔 통치로 여진족들을 교화시킴으로써 장차 반역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게 하였다. 이어 황해도관찰사, 대사헌, 도승지, 대사간, 형조판서를 지냈고 1585(선조 18)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9년(선조 22) 우참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외직을 자청하였다. 개성유수로 있으면서 향교 교육을 진흥시키고, 자신의 녹봉으로 노비를 매입하여 성균관에 소속시키는 등 치적을 쌓다가 이듬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우직은 평소 매우 청렴하여 값비싼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성품이 곧아 여러 관직을 거치면서도 세력자에게 빌붙지 않았다고 한다. 1581년 대사헌에 임명될 때도 평소 청렴결백한 지조와 순진 솔직한 품행을 지녔기 때문에 모두가 합당하다고 여길 정도였다. 또 평소 희로애락을 술로 달래면서 지냈는데 시사(時事)를 물으면 ‘그것이 나와 무슨 관계냐’고 반문하였기 때문에 하관선생(何關先生)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다가 신도시가 건설되면서 화장되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