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6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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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珍山 |
영어음역 | Yu Jins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정진 |
[정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
[활동사항]
호는 옥계(玉溪)이다. 1905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출생하여 1974년 결장암(結腸癌)으로 사망하였다.
유진산(柳珍山)은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자퇴했고, 이후 보성중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다가 중퇴했다. 1942년 만주로 건너가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1945년 8·15해방이 되자 정계에 투신하여 주로 청년 조직의 결성과 청년운동의 활성화에 전력했다. 1946년 4월 9일 좌익 청년 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항한 우익 청년 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을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김두한이 감찰부장으로 있던 이 단체는 미군정에 의해 폭력 단체로 해산 명령을 받자, 1947년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조직으로 개명하여 계속 반공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이승만의 청년 단체 통합 지시로 1948년 12월 통합된 대한청년단에서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했다. 1951년 민주국민당 총무부장을 지내고,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에 고향인 금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1956년 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다. 1958년 제4대 민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재선되었고, 11월 원내총무가 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4·19혁명으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민주당이 신·구파로 분열하자 신익희·조병옥 등이 이끄는 구파 동지회에 가입했다. 1961년 2월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하자 동당의 간사를 맡았다.
1963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을 지내다가, 김병로와 윤보선 등이 주축이 되어 민정당을 결성하자 민정당의 중앙상무위원 겸 기획위원회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민정당 전국구 후보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마닐라에서 개최된 아시아 민족반공대회에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가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영등포 갑구, 신민당]되었고, 아울러 신민당 수석부총재를 지냈다. 1970년 신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입후보 공천 문제로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으나, 1973년 5월 다시 총재직에 복귀했다. 1971년과 1973년 제8, 제9대 국회의원에 계속 당선되어 6선 의원이 되었다.
유진산은 1967년 6월 8일 실시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 소속으로 영등포 갑선거구[지금의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신도림동 중 구(舊) 경인가로 이동(以東) 지역과 금천구 독산, 시흥동 지역, 신길, 신대방, 대방, 상도, 노량진, 노량진본, 흑석, 동작, 양재, 원지, 우면, 사당, 방배, 서초, 반포, 잠원, 신림, 봉천동 지역]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1년 6월 30일 임기를 마쳤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농민독본』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4년 5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