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03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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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晉州柳氏 |
영어음역 | Jinjuyussi |
영어의미역 | Jinjuyu Clan |
이칭/별칭 | 진주류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집필자 | 김정진 |
세거지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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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 | 서울특별시 구로구 오류2동 안오류골 |
입향시기/연도 | 1512년 |
성씨시조 | 유인비(柳仁疪) |
입향시조 | 유순정(柳順汀) |
[정의]
유인비를 중시조로 하고, 유순정을 입향조로 하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유차달(柳車達)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후삼국 통일 전쟁 당시 유주(儒州)[문화의 옛 이름]의 호족이었다. 5대조인 유색(柳穡)이 신라 헌덕왕 때 유주의 구월산(九月山)으로 은거한 이래 자손들이 그 지역에서 대를 이어 살다가 고려 개국 이후 개성에서 세거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군량 보급에 문제가 생기자 유차달은 수레 1천량을 만들어 군량을 조달하였다고 한다. 그 공으로 대승(大丞)에 올라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해졌다고 한다. 유차달의 원래 이름은 유해(柳海)였으나 태조가 이차위달(以車爲達)하였다고 하여 유차달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유씨는 대승공(大丞公) 유차달 이후 10대에 내려와서 문화유씨, 진주유씨, 전주유씨, 선산유씨, 서산유씨, 풍산유씨 등 6개 파로 분파되었다. 그 중 9세손인 유인비(柳仁疪)가 진산군으로 봉해지면서 문화유씨에서 이봉되어 진주유씨의 성을 받아 중시조가 된다.
[입향경위]
입향조 유순정(柳順汀)은 1487년(성종 18)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전적으로 관직에 출사하였다. 이조판서 재임 시 박원종, 성희안 등과 폭군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정국공신에 책봉되고, 이어서 청천부원군에 봉해졌다. 1510년(중종 5) 제포의 왜인이 시끄럽게 하자 도체찰사로 모든 사건을 처리하고, 경상도도원수가 되어 삼포왜란을 평정하였다. 공은 1509년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그해 12월 54세로 졸하고, 사후에 중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공의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가 명종 때에 문성으로 고쳤다.
한편 영의정이었던 유순정이 죽자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거두는 ‘철조삼일(輟朝三日)’의 예우와 함께 부천 오류골, 온수골[현 구로구 오류동, 온수동] 일대와 부천시 여월동, 작동에 이르는 지역 30 만 평을 묘역으로 사패(賜牌)하여 후손들이 묘역 관리를 위해 이 지역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현황]
입향조 유순정의 후손들은 490여 년 동안 구로구 오류동, 온수동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여 내려 왔다. 2000년 11월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진주유씨는 구로구 지역에 235세대 822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관련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