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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 왕조가 지속되었던 시기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조선 시대 양주(楊州)는 원래 한양, 즉 지금의 서울이었다. 1392년 새롭게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후기까지 양주로 불리던 한강 북부의 한양부가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였으며, 기존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見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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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기도 양주의 누원점(樓院店)에서 활약한 사상인(私商人). 양주의 누원점은 함경도로부터 한양으로 올라오는 모든 물산의 집산지였으며, 18세기 이후 한성부의 시전 상인을 위협하는 유통의 거점이었다. 동북 지방에서 생산되는 북어(北魚)·마포(麻布)와 삼남 지방에서 생산되는 면포(綿布) 등이 누원점에서 활발하게 교환되면서 누원점의 상인은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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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에서 운영된 군사용 통신 수단. 봉수는 조선 시대 통신 수단으로 설치 운영된 것으로 긴급한 군사상의 연락 사항이 있을 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로 중앙에 전달하는 데 이용되었다. 전국 620여 개의 높은 봉우리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서울의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으로 연결되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423년 2월 26일 기사에 의하면,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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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에 있던 산. 또는 그 산이 있던 자연 마을. 서산(西山)은 조선 시대에 한양[서울]에서 볼 때 서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부곡리를 둘러싸고 있는 산으로는 일영봉·제일봉·종래봉·매봉 등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는 것인지, 네 개의 산 전체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서산은 서산골짜기라고도 불렀으며, 장흥면 전체를 가리키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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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驛)과 관청에 지급된 토지. 교통의 중심지에 설치된 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급된 전답을 역토(驛土), 지방이나 중앙 관청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각 관청에 지급된 토지를 관둔전(官屯田)이라 하며 이를 합하여 역둔토(驛屯土)라 한다. 『양주정간책(楊州井間冊)』에 의하면 조선 시대 양주에는 6개의 역토와 14개의 둔토(屯土)가 있었다. 양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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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군익도(軍翼道) 체제에 따라 경기도 양주에 설치된 군사 조직. 중앙군과 지방군의 일원화를 위한 진관 체제가 성립되기 전, 국경 지대를 중심으로 설치되어 있던 영(營)·진(鎭)을 내륙에 있는 주현(州縣)에도 설치하여 방어의 허술함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1455년(세조 1) 전국의 각 도를 몇 개의 군익도로 나누고 각 군익도를 다시 중·좌·우의 3익(翼)으로 나누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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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일본의 침략으로 경기도 양주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16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명나라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 정권 수립 등 주변 정세의 변화 속에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조선은 16세기 초에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일본과의 교역을 단절하여 임진왜란 직전에는 양국간의 교섭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 무렵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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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경기도 양주 해유령에서 왜적을 상대로 벌인 전투. 16세기 동아시아 사회는 명나라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 정권 수립 등 주변 정세의 변화 속에 크게 동요하였다. 특히 조선은 16세기 초에 일어난 삼포왜란을 계기로 일본과의 교역을 단절하여 임진왜란 직전에는 양국 간의 교섭이 전무한 상태였다. 이 무렵 일본은 오랜 내란을 끝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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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부터 2003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1466년(세조 12) 이래 양주목(楊州牧)이었던 양주 지역은 1895년(고종 35) 23부제 실시에 따라 한성부 소속의 양주군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지방 제도가 변화되면서 양주목은 한성부 소속 3등군(三等郡)인 양주군으로 변경되었다. 1896년 8도제로 변경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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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3년부터 1466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도호부는 조선 시대 군(郡) 위에 두었던 지방 관아로, 1406년(태종 6) 도호부를 종3품관으로 하여 정3품관인 대도호부와 목(牧) 아래에 두었다. 1415년에는 1,000호 이상 되는 지역을 도호부로 규정하여 해당되는 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는데, 양주부는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전략적 위치의 중요성과 태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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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부터 1895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조선 시대 지방 행정 제도에 의해 설정된 목(牧)·부(府)·군(郡)·현(縣) 중에서 양주는 가장 큰 규모의 행정 단위인 목에 해당하였으며, 해당 지방관의 명칭은 목사(牧使)였다. 조선의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던 양주의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1466년(세조 12) 양주도호부를 양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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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5년부터 1413년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도읍을 한양, 즉 예전의 양주로 옮기면서 옛 양주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을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로 강제로 이주시키고 양주를 양주군(楊州郡)으로 강등시켰다. 1395년(태조 4) 고려 시대 견주 지역으로 다시 한 번 이주시킨 후 백성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하여 양주군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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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1397년(태조 6) 수도 한양이 만들어지면서 원래 한양[옛 명칭 양주]에 살던 사람들을 동촌 대동리로 이주시켰다가, 다시 대동리에서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에 있었던 고려 시대 견주의 읍치로 이전되면서 주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연산군 때 양주목이 폐치되었다가 1506년(중종 1) 양주목의 읍치가 지금의 양주시 유양동으로 이전되면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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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광석면(廣石面)은 너른 들판이라는 뜻의 ‘너븐들’을 그대로 한자로 써서 ‘넓다’는 뜻의 ‘광(廣)’자와 들판을 뜻하는 들의 와전인 돌의 한자어 ‘석(石)’자를 합하여 광석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광석면이 언제 정확하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조선 후기에 각 군현의 면리제(面里制)가 정착되면서 양주목에도 면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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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묵은면(默隱面)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인 민무질(閔無疾)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여흥 민씨 집안에서 이 지역을 사패지(賜牌地)로 하사 받은 후, 어느 누구도 농사를 짓지 못하는 가운데 외부에 가려 있고 황무지가 많은 척박한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후기 각 군현의 면리제(面里制)가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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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백석(白石)’은 조선 시대부터 사용되는 용어로 전국 어디에나 존재한다. ‘백석’이라는 땅 이름이 존재하는 대부분의 지역을 보면 흰 돌이라는 자연물을 그대로 한자로 옮겨 ‘백석(白石)’이라고 했다기보다는 큰 들판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한돌’이 변하여 ‘한돌 → 흔돌 → 흰돌 → 백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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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1397년(태조 6) 양주부(楊州府)의 치소를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에서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고려시대 견주(見州)의 옛터]로 옮기면서 주내(州內)라 불리게 되었다. 1506년(중종 1) 읍치를 다시 지금의 양주시 유양동으로 이전하면서 주내는 조선 전기 양주목의 읍치가 있었다는 뜻에서 고주내면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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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서석적면(西石積面)은 양주목의 서부에 있으며, 들판이 거듭 계속되고 있다는 뜻에서 들의 와전인 돌의 한자어 ‘석(石)’자와 ‘거듭된다’는 뜻의 ‘적(積)’자를 합하여 서석적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석적면이 언제 정확하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조선 후기에 각 군현의 면리제(面里制)가 정착되면서 양주목에도 면이 만들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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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어등산면(於等山面)은 현재의 양주시와 동두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칠봉산의 옛 이름인 어등산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전기 태조·태종·세종·세조 등 많은 임금이 강무(講武)와 사냥을 하기 위해 양주 지역을 방문하였는데, 칠봉산을 올라 해룡산 자락에서 강무를 즐겼다고 한다. 이후 임금이 오르는 산이라는 뜻에서 ‘어등산’이라는 이름이 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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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연산군 때 양주목이 폐치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설치될 때 읍치도 지금의 양주시 유양동에 새로 조성되었다. 이에 양주목의 읍치가 있는 곳이라는 뜻에서 읍내면(邑內面)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읍내면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이다. 이후 각종 지리지와 『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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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진답면(陳畓面)은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의 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 민무질(閔無疾)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여흥 민씨 집안에서 이 지역을 사패지로 하사받은 후, 어느 누구도 농사를 짓지 못하는 가운데 외부에 가려있고 항상 농사를 짓지 않고 물이 차 있어 질퍽한 논이라는 뜻에서 진답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진답면이 언제 정확하게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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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천천면(泉川面)은 지금의 샘내고개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신천의 옛 이름인 ‘샘내’에서 유래하였다, 샘내는 샘에서 흘러나가 내를 이루는 곳이라는 뜻이며, 한자로는 천천(泉川)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천천면이 언제 정확하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조선 후기에 각 군현의 면리제(面里制)가 정착되면서 양주목에도 면이 만들어지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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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현내면(縣內面)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고구려·백제에서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爾米)라고 부르던 지역이다. 내을매현 혹은 내이미라는 땅 이름은 이미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신라가 이곳을 점령하면서 경덕왕 때에 이르러 사천현(沙川縣)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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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목에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 회암면(檜巖面)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 최대 거찰인 회암사(檜巖寺)가 있어 붙여졌다. 회암면이 언제 정확하게 만들어졌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조선 후기에 각 군현의 면리제(面里制)가 정착되면서 양주목에도 면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면이라는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기록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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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교통·통신 제도. 역(驛)은 고대 이래 고려·조선 시대에 중앙 정부와 지방 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 통신 조직의 일종이다. 역은 국가가 지방 통치를 위한 정령(政令)의 전달과 관리의 왕래, 외교 사행의 영송(迎送), 군사의 왕래 등 국가의 공적 행위가 원활히 수행되도록 하는 교통·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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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화도읍 구암리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구곡역(仇谷驛)은 고려 시대에는 춘주도(春州道)의 역 가운데 양주[남경] 지역에 속해 있으면서 양주·한양에서 춘주[춘천] 방면을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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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에 설치되었던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려와 조선 시대 주요 도로에 일정한 거리마다 설치되어 교통 통신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불렀다. 노원역은 청파역과 함께 한성부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함경도 지방을 연결하는 첫 번째 역으로 청파역과 함께 병조에서 관리하였다. 노원역은 다른 지역의 역들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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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의정부시 녹양동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대 이래 고려·조선 시대에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녹양역(綠楊驛)은 고려 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의 역 가운데 양주 관내 견주 지역에 속해 있으면서 개경(開京)에서 양주[남경] 방면을 연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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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진전읍 내곡리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쌍수역(雙樹驛)은 고려 시대에는 상수역(桑樹驛)으로 불렸으며 춘주도(春州道)의 역 가운데 양주 관내 풍양현에 속해 있으면서 양주[남경]에서 포천·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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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까지 경기도 양주에 설치된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영서역(迎曙驛)은 고려 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의 역 가운데 양주[남경] 지역에 있으면서 파주·교하·개경 등지를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양주 치소에서 서쪽 60리[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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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부터 조선까지 경기도 양주에 설치된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대 이래 고려·조선 시대에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청파역(靑坡驛)은 고려 시대에는 청교도(靑郊道)의 역 가운데 양주[남경] 지역에 있으면서 파주·교하·김포·부평 등지를 연결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숭례문[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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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속했던 남양주시 삼패동 평구마을에 있던 교통·통신 기관. 역(驛)은 고대 이래 중앙 정부와 지방간의 효율적인 연결망을 구축하기 위해 육로(陸路)에 설치한 교통·통신 조직의 일종으로 역참(驛站)이라고도 하였다. 평구역(平丘驛)은 고려 시대에는 남경[양주]에서 평창이나 봉화 방면으로 갈 수 있는 평구도(平丘道)의 중심 역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찰방(察訪)[종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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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의 주요 도로에 세워져 국가가 경영한 여관. 원(院)은 고려·조선 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둔 국영 숙식 시설의 일종이다. 대개 역(驛)과 관련되어 역의 중간 지점에 설치되므로 보통 역원(驛院)이라 하였다. 공무 여행자의 교통 숙식 시설 중에는 관(館)도 있었는데, 객관(客館) 혹은 객사(客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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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있던 국영 숙식 시설. 원(院)은 고려·조선 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지역에 설치한 국영 숙식 시설로, 대개 역(驛)과 관련되어 역의 중간 지점에 설치되므로 보통 역원(驛院)이라 하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원은 중앙 집권적 지방 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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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경기도 양주에 있던 국영 숙식 시설. 원(院)은 고려·조선 시대에 공무로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주요 도로나 인가가 드문 지역에 설치한 국영 숙식 시설로, 대개 역(驛)과 관련되어 역의 중간 지점에 설치되므로 보통 역원(驛院)이라 하였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원은 중앙 집권적 지방 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교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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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진관 체제에 따라 경기도 양주 지역에 편성된 군사 체제. 1457년(세조 3) 세조는 군익도(軍翼道) 체제를 강화하여 진관 체제로 바꾸었는데, 이때 경기도에 양주진을 비롯한 수원진, 광주진, 강화진, 개성진 등 총 5개 진을 설치하여 수도 한양을 방어하는 군사 조직으로 활용하였다. 당시 계유정란에 의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많은 반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으므로 군사 조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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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양주목[현 경기도 양주시]을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조선 초기 양주는 양주군, 양주도호부를 거쳐 1466년(세조 12)에 양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수도 한성부를 보좌하는 기보(畿輔) 지역으로서의 특성을 감안하여 중요 지방 행정 구역인 목(牧)이 된 것이다. 양주목은 연산군 때 잠시 폐지되었다가 중종 때 다시 부활하여 1895년(고종 32) 전국의 지방 행정 구역을 정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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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경기도 양주를 관할하던 최고위 관직. 양주는 고구려의 북한산군으로 고려 시대에 남경유수관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1308년(충렬왕 34) 한양부(漢陽府)가 되었다. 한양부는 현재의 서울을 포함하여 교하군·견주·포주·행주·고봉현·봉성현·심악현·풍양현·사천현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영역이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한양부를 도읍으로 정하면서 현재의 서울 지역에 도성이 건설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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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 정기 시장의 변천. 조선 후기에 들어와 활성화되기 시작한 각 지방의 정기 시장을 장시, 또는 장이라고 부른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각전조(各廛條)에 “행상이 모여서 교역하고는 물러가는 것을 장(場)이라고 이른다”라고 개념을 규정하고 있다. 지방을 떠돌며 상업에 종사하는 장꾼은 이미 백제 가요 「정읍사」에 나타나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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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경기도 양주목 광석면[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에 있던 다리. 가업교라는 명칭은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등장한다. 가업교는 가래나무[추자목(楸子木)]가 많은 마을에서 그 나무를 이용해 만든 다리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에 가래비 혹은 가라비(加羅非)는 백석면[현 백석읍 가업리] 쪽에도 있었지만 『1872년 지방지도』 등에 등장하는 가라비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