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9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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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貞淑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손광순 |
출생 시기/일시 | 1858년 - 이정숙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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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874년 - 신정왕후의 조카인 조영하와 결혼 |
활동 시기/일시 | 1875년 - 정경부인에 봉해짐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1월 - 엄황귀비가 조직한 한일부인회의 회장으로 추대 |
활동 시기/일시 | 1906년 6월 - 명신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 학무국 교육 공로자 표창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동아일보사 민간 교육 공로자 은배 수여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 학무국 은배 수여 |
몰년 시기/일시 | 1935년 5월 4일 - 이정숙 사망 |
출생지 |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471 |
거주|이주지 | 서울특별시 |
활동지 | 서울특별시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산76-1 |
성격 | 교육자 |
성별 | 여 |
본관 | 전주 |
대표 경력 | 명신여학교 초대 교장 |
[정의]
근대 경기도 양주 출신의 여성 교육자.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이해석(李海石)이고, 오빠는 죽산군수를 역임한 이원상(李源商)이다.
[활동 사항]
이정숙(李貞淑)[1858~1935]은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471번지[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의 훈육을 받으며 자랐다. 16세 때 신정왕후(神貞王后)의 조카인 조영하(趙寧夏)와 혼인하였다. 조영하는 인격과 학식을 겸비한 청년 재상으로 1863년 과거에 급제한 뒤에 호조판서·훈련대장·병조판서·도통사 등을 지내고 예조판서로 있던 중,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에서 개화당에 의해 피살되었다. 당시 27세의 젊은 나이로 남편을 잃은 이정숙은 허탈감으로 남편을 따르려 1주일이나 단식을 하였으나 시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로 마음을 돌려 시어머니 공양과 아들 양육에 전념을 다하였다.
1906년 1월 엄황귀비(嚴皇貴妃)가 한일부인회를 조직하여 총재를 맡았을 때 이정숙은 회장에 취임하였다. 한일부인회는 표면적으로는 한국 여성의 계몽 및 교육을 목표로 내세웠으나, 사실은 황족 및 통감부 계열의 일본인 부인들이 임원을 맡고 있는 친일 단체였다.
1906년 6월 엄황귀비의 후원을 받아 종로구 수송동에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현 숙명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때 이정숙은 덕이 없고 배움이 적은 것을 이유로 몇 번이나 사양하였으나 고종의 하명으로 맡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정숙은 여성의 신교육을 반대하는 학부모를 일일이 가정 방문하여 부모를 설득, 양가 자녀를 기숙사에 입학시켜 학비와 기숙사비 등을 받지 않고 무료로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4년 이후에는 우수한 학생들을 일본에 유학시키는 등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여 졸업생에게도 장학금을 지급하였다. 또 매년 일본의 도쿄여자고등사범학교와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奈良女子高等師範學校] 등에 진학을 시켰다. 1935년 임종 직전에 퇴직금 전액을 학교법인 숙명학원(淑明學院)에 장학 기금으로 희사하여, 2012년 현재까지 이정숙 장학회가 운영되고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산76-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875년 정2품 이상 관인의 부인에게 주어지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의 호칭을 받았다. 1924년 학무국에서 교육 공로자 표창을 받았으며, 1927년 동아일보사로부터 민간 교육 공로자에게 주는 은배(銀杯)를 받았고, 1928년에는 조선 여성 진작의 공으로 학무국으로부터 다시 은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