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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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龍翼 |
이칭/별칭 | 운경(雲卿),호곡(壺谷),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권만용 |
출생 시기/일시 | 1628년 -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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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46년 - 진사 |
활동 시기/일시 | 1648년 -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655년 - 통신사 종사관으로 왜에 파견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양주목사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좌참찬, 예문관 제학 |
활동 시기/일시 | 1685년 - 형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687년 - 판의금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688년 - 대제학, 이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689년 - 명천에 유배됨 |
몰년 시기/일시 | 1692년 -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60년 - 목사 남용익 불망비 건립 |
부임|활동지 | 양주목사 - 경기도 양주시 |
유배|이배지 | 명천 - 함경북도 |
기념비 | 목사 남용익 불망비 -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507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의령 |
대표 관직 | 이조판서 |
[정의]
양주목사를 지낸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아버지는 부사 남득명(南得明)이다.
[활동 사항]
남용익(南龍翼)[1628~1692]은 1646년(인조 24) 진사가 되었고, 1648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시강원 설서, 성균관 전적, 삼사를 지냈고, 병조좌랑과 홍문관 부수찬 등 중앙의 요직을 거쳐 경상 도사로 나갔다. 1655년(효종 6) 통신사의 종사관으로 왜에 파견되었을 때, 벼슬아치의 우두머리인 관백(關白)의 원당(願堂)[위패를 모신 법당]에 절하기를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식사를 주지 않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이듬해 조선으로 돌아와 독서 연구 기구인 독서당[일명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문신 중시(文臣重試)에서 장원을 하여 당상관으로 진급하였다. 형조 참의와 예조 참의, 승지를 지내고 1657년(효종 8)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나갔다.
이후 대사간과 대사성을 거쳐 공조 참판을 제외한 5부서의 참판을 지냈으며, 외직으로 경상도 감사 및 경기도 감사로 나갔다가 형조판서에 올랐다. 1680년(숙종 6) 좌참찬 및 예문관 제학, 1685년(숙종 11) 형조판서, 1687년(숙종 13) 판의금부사, 1688년(숙종 14) 대제학, 이조판서를 지냈다. 1689년(숙종 15) 숙종이 소의 장씨(禧嬪張氏)가 낳은 이윤(李昀)[후에 경종]을 원자로 삼으려 하자 반대하여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 1692년(숙종 18) 65세의 나이로 귀양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숙종실록(肅宗實錄)』은 남용익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글솜씨가 민활하여 붓을 쥐었다 하면 말이 곧 글이 되었다. 일찌감치 이름을 알리고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청현한 벼슬을 지냈다. 동전(東銓)[이조판서]이 되어서는 문병(文柄)[대제학]을 도맡아 보았고, 품계가 보국(輔國)에 이르렀다. 후덕한 성품으로 일 처리에 치우침이 없고, 논쟁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와 술을 벗삼아 조용히 지내니 세상일에 관심이 없는 듯 보이지만 주관이 뚜렷하였다. 말과 행동이 신중하고 몸가짐이 소박하여 여러 차례의 변란 속에서도 흠을 잡히지 않았다. 원자(元子)의 호칭을 정할 때 ‘중대사를 급히 의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가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되었고, 뒤 이어 간사한 무리의 모함을 받아 오래도록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만년의 지조가 굳세다’라고 칭송하였다. 사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학문과 저술]
남용익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인조 대까지의 명인 497명의 시를 모아서 엮은 『기아(箕雅)』와 『부상록(扶桑錄)』, 자신의 시문집인 『호곡집(壺谷集)』을 남겼다. 글씨로는 예판남선비(禮判南銑碑)와 「도검제남은표(都檢制南誾表)」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이다.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507번지에 목사 남용익 불망비가 있다. 1660년(현종 1) 세워진 유백색의 대리석 비신은 비스듬히 결이 나 있고 마모가 심하다. 비두 앞쪽 상단에는 구름 속에서 쌍룡의 머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뒤쪽 상단에는 구름 속의 달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