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9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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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상대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노현 |
살길을 찾아 들어왔지만, 상대원에서도 먹고 살길이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릴없어 하다가, 얼마 전 지나가던 화장품 장사에게 물었던 것처럼, 지나가는 굴비장사를 보고 물었다. 굴비 장사하면 밥 먹고 사나요?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것은, 옛날 이야기 책에나 나올 만한 그 황당한 우연성이다. 그때 화장품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고, 굴비 장사가 지나가지 않았다면 봉씨는 무엇을 하게 되었을까. 그러나 누구나 어려웠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봉씨처럼 우연성에 기초하여 삶을 꾸려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 그 또한 삶의 진정성에서 크게 벗어난다고 할 수 만은 없다.
어쨌든 우연히 굴비장사에게서 얻은 정보를 가지고, 을지로 옆 중부시장으로 굴비를 하러 갔다. 520번을 버스를 탄 봉씨의 주머니에는 결혼반지를 팔아 찡가두었던 몇 푼의 돈이 들어 있었다.
“그래 가지고 뭐가 굴비가 좋은지 뭐가 안 좋은지 모르지 않습니까, 내가. 그러니까 가만히 옆에 보니까 굴비 띠러 온 사람이 있어요. 그래가 옆에 좀 많이 산다 싶은 사람 옆에 붙어서, 아저씨 내하고 같이 합동으로 사가지고 돈대로 나눕시다. 많이 띠면 많이 싸잖아요.”
봉씨는 굴비를 짊어지고 수진동고개에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굴비 사이소’ 소리를 해야 하는데 그 소리가 안 나왔다. 점심 대신 막걸리 반 되를 걸쳤다. 그날 오후 내내 봉씨에게 굴비를 사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개시도 못하고 다시 김장사에 나섰지만 그것도 신통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 한두 톳이 팔리는 정도였다.
봉씨는 또 한 번은 옆사람 말을 듣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골동품을 걷어다 파는 장사를 했다. 반다지며 감나무 뿌리로 만든 장이며 정교하게 만들어진 옛 물건들을 쉽게 내다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귀신 붙은 물건이라고 물건을 갖다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되겠다 싶은 좋은 물건을 만나도 서울로 옮기는 비용 때문에 혼자서 맡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두세 사람씩 함께 짝을 지어 일을 해야 했다. 그리나 무엇보다도 골동품을 구별하는 안목이 없었던 터라 그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봉씨의 삶은 상대원으로 옮긴 이후에도 여전히 궁핍했다. 산후 조리하는 부인에게 보리밥조차 제대로 챙겨줄 수 없었고, 아이 기저귀는 처가에서 해 보낸 것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교사인 동갑내기 처남이 다녀가면서 5만원을 두고 갔지만 돌려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