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유림의 자존심으로 쓴 파리 장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76
한자 居昌 儒林- 自尊心- - - 長書
이칭/별칭 파리 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다전길 20[중촌리 2252]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배병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2월 19일 - 윤충하, 다전 마을 곽종석을 방문하여 독립 청원서 유림 대표로 동참을 간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4일 - 곽종석이 파견한 곽윤과 김황, 김창숙을 만나 독립 청원 운동 가담을 약속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9일 - 곽종석, 곽윤과 김황을 만나 김창숙의 제안을 수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14일 - 곽종석, 김창숙을 만나 청원 운동의 대표를 맡기로 재차 확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21일 - 곽종석과 김창숙 파리 장서 완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4월 18일 - 곽종석 경찰에 검거

[정의]

1919년 거창군의 곽종석이 유림 대표로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한 사건.

[의병의 시대가 가고 만세 시위가 전국을 휩쓸다]

1894년 봉건적 사회질서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봉기한 가조면의 농민들은 거창읍을 향해 진군하다 관군과 일본군에 진압당하였다. 유생들은 신분 질서를 뒤흔드는 농민군들을 스스로 민보군을 조직하여 처단하였다. 개항 초기 ‘근대’의 변화에 모든 것이 혼란스럽던 시절, 민중과 유생이 꿈꾸던 나라는 달랐다. 그러나 을사늑약(1905)을 전후로 국권 피탈의 위기 속에 둘은 함께 총을 들었다.

경상남도 거창군은 의병의 고장이었다.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연봉의 크고 작은 전투들에 유생들이 의병장이 되어 활약하였다. 노응규(盧應奎)거창군 고제면 출신으로 안의에서 문인들을 모아 1896년 경상남도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오일선(吳馹善)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 서당에서 40여 명의 동지들과 결의하고 의병 전쟁에 나섰다. 김훈(金壎)은 허위·이인영과 함께 13도 창의군의 일원으로 한성 진공을 시도하기도 했다. 때로는 오 진사, 이 진사처럼 이름 석 자도 후세에 제대로 전하지 못한 채 스러져 간 이들도 있었다.

1910년 7월 감악산 연수사에서 최후의 항전 후 더 이상 거창에서 의병 전쟁은 없었다. 그해 8월 23일 대한제국이 무너졌고, 이태 후 도피 중이던 덕유산 의병장 문태수(文泰洙)까지 체포되면서 의병의 시대는 저물어 갔다. 지역 사회는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납세 거부 등 소극적 저항은 있었지만, 일제의 압도적 물리력 앞에 별 다른 조직적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지는 못했다. 기미년 만세 시위가 전국을 강타하기 전야까지 거창 사회는 일견 평온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전 조선이 비탄에 빠졌다. 1월 30일 거창군 주상면이주환(李柱煥)은 면사무소로부터 자신의 민적을 넘겨받아 찢어 버리고 침류정에서 자결하였다. 지난날 헌병이 강제로 손도장을 찍게 하자 엄지를 잘랐던 그였다. 이어서 2월 7일 거창군 남하면 윤봉의(尹鳳儀)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을사늑약 후 자결하려 하였으나 황제보다 먼저 죽을 수 없어 미루어 두었던 것을 드디어 결행한 것이다. 1854년생, 1839년생 두 노의사의 의로운 죽음은 숨죽여 지내던 유생들 사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고종의 인산을 앞 둔 3월 1일 경성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얼마 후 거창에도 파급되었다. 가조면에서 3월 20일과 22일, 위천면에서는 4월 8일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벌였는데, 헌병 주재소를 습격하고 사망자가 5명 발생하는 등 그 양상이 격렬했다. 유생들은 문중 조직을 이용하여 대규모 군중을 동원하는 등 만세 시위에 앞장섰다. 그즈음 영남 유림의 대표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에게도 결단의 시간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망국의 대부가 드디어 죽을 곳을 얻었노라]

곽종석은 조선 말기 이학(理學)의 6대가 중 한 명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제자로, 그 학맥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1846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에서 태어나, 1896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다전 마을로 이주하여 강학소를 차리고 인재 양성에 매진하였다. 1896년 구미 공관에 포고 천하문(布告天下文)을 보내어 명성 황후 시해와 단발령 강요 등 일제의 만행에 대해 규탄하였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을 반대하고 을사오적의 처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4차례나 올렸다. 그러나 경술국치 후에는 두문불출한 채 외부 문제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었다. 만세 시위 전후 이러한 곽종석을 만나기 위해 그의 문인들과 명망가들이 비밀리에 다전 마을로 찾아들었다.

먼저 1919년 2월 19일 곽종석의 문인 윤충하(尹忠夏)가 방문했다. 윤충하는 스승을 만나 그간 궁중에서 벌이진 일과 고종 황제 국장 준비 상황에 대해 얘기한 후 곧 개최될 파리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는 문제에 관해 설명하면서 유림의 대표로 동참해 줄 것을 간청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론’에 힘입어 세계 식민지 약소민족으로 하여금 독립의 희망을 갖게 하는 국제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에 경성의 일부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정리를 위해 열리는 파리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보내자는 논의가 일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 측에서도 파리 회의에서 조선 독립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이완용 등 친일파를 부추겨 조선 민족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지 않는다는 ‘독립 불원서(獨立不願書)’를 작성케 했다. 그런데 이완용이 이 문서에 서명하도록 고종에게 강요하다가 끝내 거부하자 독살했다는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나돌았다. 소문 그 자체로도 유림을 격분케 했거니와, 더 심각한 문제는 독살의 근거가 된 독립 불원서에 유림의 대표로 김윤식이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었다. 전국의 유림은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여러 갈래에서 독립 청원서를 논의하고 있던 터였다. 그중 한 부류에서 곽종석을 대표로 올리기 위해 윤충하가 찾아온 것이다.

곽종석은 이에 대해 크게 공감하면서도, 다만 “먼 바깥의 일은 앉아서 예측할 수 없으므로” 고종의 인산 전에 젊은 문인 한두 명을 보내어 상의토록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후 조카인 곽윤(郭奫)과 제자 김황(金榥)을 경성에 보내어 구체적 일을 협의하도록 했다. 2월 27일 도착한 그들은 정작 윤충하와는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3월 4일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곽종석의 뜻을 전했다. 김창숙 역시 곽종석의 제자로,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조선 독립 선언서’가 낭독되는 광경을 보고 민족 대표 33인에 유림의 대표가 없음을 심히 부끄럽게 여겨 유림들의 청원서를 기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김창숙은 전국의 유림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지역별 담당자를 정하고 곽윤과 김황을 급히 거창으로 내려 보내 곽종석에게 청원서 작성을 의뢰했다.

3월 9일 곽윤과 김황이 다전으로 돌아와 곽종석에게 경성에서의 일을 보고했다. 곽종석은 유림의 대표가 되어달라는 김창숙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동문 장석영(張錫英)에게 초고 작성을 맡겼다. 고령에다 병을 얻어 스스로 집필하기에는 몸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황 등 문인들을 진주와 의령, 칠원 방면에 보내어 진양 하씨 등 유력 가문을 상대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3월 14일 김창숙이 다전에 왔다. 자신의 고향 성주를 비롯하여 경상북도 지역을 돌며 서명자를 확보한 후 스승을 직접 만나 그 의사를 재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면담 자리에서 곽종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망국의 대부(大夫)가 되어 항상 죽을 땅을 얻지 못함을 슬퍼하였더니 이제 군이 내 죽을 땅을 만들어 주니 참으로 고맙기 그지없네. 내가 지금 병든 몸으로 군들의 뒤를 따라 독립운동에 호흡을 같이 하고 대의에 죽는 것이 다시없는 영광일세.”

이어 김창숙이 청원서의 초고를 요구하자, 곽종석장석영에게서 받으라고 하였다. 그 길로 다전을 나선 김창숙은 몇 군데를 돌아 다시 성주로 가 장석영을 만났는데, 장석영의 초고는 김창숙의 의도와는 달리 사실에 있어 수정할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장석영이 수정을 거부하므로, 초고를 들고 다시 곽종석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3월 21일 다시 만난 곽종석은 이미 장석영의 초고를 전달받은 상태로, 이를 수정하기 위해 김창숙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곽종석장석영과는 별도로 문인 김황에게도 초고 집필을 부탁해 두었는데, 이 둘을 참조하여 원고를 완성하였고, 이날 김창숙을 만나 퇴고를 거쳤다. 곽종석이 써서 파리에 보낸 유림의 독립 청원서, 즉 곽종석의 ‘파리 장서’는 이렇게 완성되었다[이를 편의상 ‘곽종석본’이라 한다].

곽종석김창숙에게 완성된 독립 청원서를 외우게 하고, 곽윤을 불러 깨끗이 옮겨 적도록 한 후 이것으로 신총을 만들어 미투리 한 켤레를 삼아 주었다. 청원서를 파리 회의에 전달하는 일의 성패를 한 몸에 짊어진 제자를 걱정하는 노스승의 마음이었다. 또 자신의 문인 중 중국 사정에 밝은 이를 보좌역으로 추천하고, 상해에 도착하면 독립운동가 이동녕, 이시영, 박은식, 신채호, 안창호 등과 협력할 것을 권했다. 중국 측의 도움도 반드시 필요하니 손문의 막료로서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이문치(李文治)를 만나 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끝으로 상하이나 베이징에 확고한 근거지를 만들어 국내에 비밀 연락을 취하도록 지시하고, 국내에는 이미 책임자가 준비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창숙은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하기를, “선생의 용의주도함이 이와 같다.”라고 감탄하였다.

3월 23일 새벽 곽종석은 지팡이를 짚고 동구에 나와 경성으로 향하는 김창숙을 전송했다.

[파리 장서가 제출되다]

3월 25일 경성에 도착한 김창숙은 각 지역에서 받은 서명지를 수합하는 한편, 해외 파견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해외는 처음인지라 지인으로부터 유진태(柳鎭泰)와 이득년(李得年)을 소개받아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으며, 통역 겸 대동할 인물로 박돈서(朴敦緖)가 합류했다.

이렇게 진용이 갖추어지고 있던 중 유진태의 소개로 임경호(林敬鎬)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임경호는 김복한(金福漢)을 영수로 하는 기호 지역 유림단의 해외 대표였다. 같은 목적을 가진 두 유림단의 우연한 만남에 대해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신명이 도왔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서로 기뻐했다. 양측은 각자 추진하고 있던 청원 운동을 통합하기로 하고 통합 청원서는 곽종석본을 채택하니, 이는 실로 300년을 이어 온 영남과 기호 지역 간 파벌을 극복하고 대동단결을 이룬 순간이었다.

박돈서와 함께 경성을 떠난 김창숙은 일단 봉천[선양]에 들러 먼저 발송해 둔 독립 청원서와 자금을 전달받고 다시 상하이로 갔다. 그곳에서 이동녕 등 여러 독립투사들을 차례로 만난 후 파리로 자신이 직접 가려던 애초의 계획을 변경한다. 파리행은 많은 자금과 시간이 소요되며 외국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김창숙에게는 무리라는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다. 대신 임시 정부를 대표해 파리에 도착해 있던 김규식에게 청원서를 전달하기로 하고, 이를 영역하여 파리 평화 회의 의장 및 파리 위원부에 우송하였다. 그리고 구미·중국의 각 기관과 국내의 향교, 지하 신문사에도 영문본과 한문본을 발송하였다[이를 편의상 ‘통합본’이라 한다]. 이상이 기미년 곽종석·김창숙 등 영남 유림이 중심이 된 파리 평화 회의에의 독립 청원 운동, 즉 ‘파리 장서 운동’의 간단한 전말이다.

한편, 일제 경찰이 파리 장서 운동에 대해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4월 2일 성주읍 만세 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하여 취조하는 과정에서였다. 그들은 서명에 동참한 송준필(宋浚弼)의 아들과 조카로, 먼저 송준필[4월 5일]이 체포되고, 이후 장석영[4월 9일], 곽종석[4월 18일]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서명자의 전모가 밝혀진 것은 파리 장서 발송본이 지하 신문에 보도되고, 각지 향교에 도착한 6월 중·하순이었다.

5월 15일 공판이 있던 날, 재판관이 공소 의견을 묻자 곽종석은 “우리는 국법의 범법자가 아니라 포로가 된 것이니 공소할 곳이 없으며, 원수들에게 구차하게 용서를 바라지도 않을뿐더러 호소할 곳이 있다면 하늘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일로 곽종석은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8월 24일 다전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74세였다.

[파리 장서와 개혁성]

파리 장서에 서명한 이는 총 137명이다. 첫 번째 이름을 올린 이가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곽종석이고, 두 번째는 기호 유림의 김복한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서명은 곽종석김복한 두 계열에서 따로 이루어진 것을 통합한 것인데, 그중 곽종석 계열은 115명, 김복한 계열이 11명, 유림의 소속을 알 수 없는 이가 11명이다. 곽종석이 중심이 된 영남 유림이 사실상 운동을 주도했던 것이다.

곽종석 계열에도 여러 학맥이 얽혀 있었다. 곽종석을 비롯하여 장석영, 윤주하 등 ‘한주학파’라 불리는 이진상의 문인들의 학맥이 다수를 차지하는 가운데,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으로 경상남도 동부의 명망가인 노상직(盧相稷) 학맥, 영남학파의 적통으로 평가되는 경상북도 안동의 김흥락(金興洛) 학맥 등도 활발히 서명에 가담하였다.

성주와 함께 파리 장서 운동의 본향이라 할 거창에서는 곽종석 외에도 총 6명이 서명했다. 이들을 학맥으로 분류하자면, 박종권(朴鍾權)·윤철수(尹哲洙)곽종석 학맥, 변양석(卞穰錫)·윤인하(尹寅夏)·이승래(李承來)윤주하 학맥으로 분류되며, 김재명(金在明)장복추(張福樞) 학맥으로 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파리 장서 운동곽종석의 동문과 문인 등 한주학파 학맥들이 다수 동원되었지만, 지역과 학파를 초월하여 동일한 학문 성향을 보이는 학맥과 적극 교류하고 시대 문제에 공동 대처하는 개방성과 통합성을 보인다.

파리 장서 운동의 개방성과 개혁적 면모는 장서의 내용에서도 찾을 수 있다. 파리 장서에는 먼저 평화 회의의 개최 경위와 한국인의 기대를 담았다. 특히 구미 열강을 ‘대인무(大仁武)’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하늘의 뜻을 실천하는 대리자라는 뜻으로, 무력으로 불공정한 세계 질서를 고쳐 평화의 시대로 환원시킬 주체로 인식한 것이다.

이어서 한국이 오랜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지닌 문명국가라고 하면서 국권을 유지할 능력이 있음을 알린다. 국권 상실은 일부 역적과 침략 세력이 무력을 앞세워 합방을 강제함으로써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며,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전하기로 한 국제적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보호로, 다시 병탄으로 말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일본이 말하는 ‘자발적 합방’이라는 것은 만국의 공의를 속이고 한국의 여론을 왜곡한 것임을 지적한다.

장서의 마지막은 파리 회의에 대한 기대를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아울러 이에 임하는 결의를 밝히고 있다. 한국인들은 병합 후 10년간 절치부심한 끝에 평화회의 소식을 듣고 독립의 기회를 얻게 되었음을 기뻐하고 있다, 폴란드 등도 독립한다고 하므로 국제 사회의 일원인 한국도 곧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는 등 희망적 전망이 이어진다. 그리고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과 병합이 한 국가에 대한 침략에 머물지 않고 국제 질서의 근간을 뒤흔드는 중대한 행위임을 밝히고 만국 공법에 따라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지난 10년간의 식민 통치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천성과 본심은 바뀌지 않았으며, 만약 이번 기회에 독립을 쟁취하지 못할 경우 죽더라도 일본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이상과 같이 파리 장서는 전통적 위정척사 사상을 계승하되, 서양을 오랑캐라 하였던 종전의 화이관(華夷觀)에서 탈피하여, 만국 공법에 근거한 새로운 국제 질서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의병 운동, 상소 운동 등을 계승하여 독립 청원 운동을 시도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또 대한제국을 인정하기 않던 태도에서 벗어나 ‘조선’이 아닌 ‘한국’으로 표현하는 등 국가와 민족, 국민 등 근대적 국가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큰 특징이다. ‘곽종석’의 “오군오국(吾君吾國)”이라는 표현이 ‘발송본’에서 “오국오민(吾國吾民)”으로 달라진 것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이는 임금 대신 민족을 국가의 상징으로 설정한 것으로, 곽종석 세대에서 발송본을 담당한 김창숙 세대로 갈수록 근대 국가 개념이 분명해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파리 장서 운동은 거창의 자존심]

1919년 파리 장서 운동 이후 중국에서 지내고 있던 김창숙은 1925년 베이징에서 이회영과 만나 유림의 독립운동 방법에 관해 의논하면서 장기적 전략으로 해외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어 무장 투쟁을 준비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마침 경성에서 곽종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파리 장서 운동에 동참했던 유림들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 잠입하여 곽윤과 김황을 만나 거사를 협의한다. 이들을 중심으로 ‘신건 동맹단(新建同盟團)’이라는 이름의 군자금 모집을 위한 비밀 결사가 조직되었다. 모금 지역은 경상남북도로 했는데, 곽윤은 진주를, 김황은 산청을 맡고, 거창은 두 사람이 공조하기로 했다. 애초 20만 원을 목표로 하였으나 모금 성적이 예상보다 부진하여 3,000원에 그치자,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들여 와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1926년 3월 말 모금한 돈을 가지고 김창숙이 중국으로 떠나자마자 유림에 대한 검거 선풍이 일어 그 인원이 40~50명에 달했다. 김창숙, 곽윤, 김황곽종석을 계기로 재차 의기투합하여 파리 장서 운동[제1차 유림단 의거] 가담자 다수와 함께 벌인 거사라는 의미에서 이를 ‘제2차 유림단 의거’라 한다. 그 결과물이 나석주의 ‘동양 척식 주식 회사 폭탄 투척 사건’[1926]이다.

제2차 유림단 의거는 유림의 독립운동이 상소 운동과 의병 운동, 독립 청원 운동을 넘어 의열 운동으로까지 전화되어 갔음을 보여 준다. 경상남도 최초의 의병 노응규부터, 자결로 저항한 이주환·윤봉의, 상소 운동에서 독립 청원 운동으로 독립 운동의 방향 전환을 시도한 곽종석과 이를 의열 운동까지 연결시킨 곽윤 등 거창의 유림들은 언제나 시대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특히 파리 장서 운동은 거창의 유림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거창의 자존심이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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