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28
한자 百濟 復興軍
영어공식명칭 Baekje Revival Movement Arm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백승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660년 - 백제 부흥군 거창 거열성에서 활동 시작
종결 시기/일시 663년 - 백제 부흥군 거창 거열성에서 활동 종료
발생|시작 장소 백제 부흥군 - 거창 거열성 지도보기
종결 장소 백제 부흥군 - 거창 거열성

[정의]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인 거창 거열성에서 활동하며 백제 멸망 후 663년까지 백제의 부흥을 위해 싸운 군대.

[개설]

신라와 당(唐)의 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비록 백제의 중앙 정부는 항복시켰지만 이들이 곧바로 백제 전 지역을 통치한 것은 아니었다. 3년에 걸친 활발한 백제 부흥 운동이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 근처에서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6, 신라 본기 문무왕 3년(663) 2월조에 의하면, "신라는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을 목베었다."라고 하고 있다. 663년이면 백제 멸망 3년 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때 백제 거열성이 부흥 운동 세력의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거열성은 지금의 거창 지역 자체를 일컬을 수도 있으며, 거창 관내의 한 성(城)을 지칭할 수도 있다.

[역사적 배경]

거열성이 백제 영역이 된 시기는 642년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권28, 백제 본기 의자왕 2년조(642)에는 백제의 의자왕이 즉위한 다음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신라의 서쪽 일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장악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해 8월에는 합천의 대야성도 백제의 영역이 됨으로써 그 서쪽 지역인 거창의 거열성 역시 백제의 영역이 되었을 것이다.

[경과]

거창 거열성의 경우 660년 백제가 멸망했지만 663년까지는 여전히 백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신라가 백제 중심부로 나아갈 때 남쪽 지역으로 올라갔다면 거창 지역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킬 때 한강 유역의 남천주(南川州) 쪽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남하하여 부여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거창 지역은 660년 이후에도 신라에 편입되지 않고 계속하여 백제 잔여 병력 혹은 반신라 세력으로 남아 항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

백제 부흥군은 663년 신라 장수 김흠순, 천존 등에게 거열성이 함락되고 700여 명이 참수당하며 타격을 받았다. 이후 백제 부흥군은 연달아 거물성과 사평성, 덕안성, 그리고 주류성을 함락당하며 궤멸에 이르게 된다. 현재 거열성은 성곽 길이 2.1㎞, 폭 7m의 산성으로서 부분적으로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거열성은 가야 세력에 의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되며, 거창 지역은 가야 거열국의 유민들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할 무렵인 562년 신라에 복속되어 신라의 땅이 된 지역이다. 신라에 패망한 이후에도 오랫동안 반신라적 감정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19, 흠명기(欽明紀) 기사에 ‘자타(子他)’라는 국명이 보인다. 이는 거열의 또 다른 이름인 거타(居陁)에 대한 이표기(異表記)이다. 자타국은 그 멸망 과정이 고령의 가라국(加羅國)과 동일한 길을 걸은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끝내 항거하다가 멸망당한 것이다. 그리고 541년과 544년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열리는 가야 복건 회의에도 참석하는 등 꾸준히 반신라적 성향을 보여 왔다. 그리고 멸망할 때까지 독립된 가야의 일국으로 존재했다. 또한 삼족 토기 등 거창 지역에서 출토되는 백제 문화 요소들로 볼 때, 신라 보다는 백제와 문화적 친연성이 엿보인다. 이러한 점들은 멸망 후에도 여전히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거열성백제 부흥군이라 표현되었지만 어쩌면 거열국 부흥 세력일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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