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03
한자 古代
영어공식명칭 Ancient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백승옥

[정의]

초기 철기 시대부터 남북국 시대까지 거창의 역사.

[개설]

거창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 이래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인간들이 살아왔다. 문헌 기록이 없어 고고학적 자료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살펴보는 시기를 선사 시대라 한다.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초기 철기 시대[혹은 원삼국 시대]가 되면 작은 나라라는 의미의 소국(小國)[읍락 국가, 혹은 부족 국가라고도 함]이 형성되었다. 거창 고대사는 이때부터 남북국 시대까지의 역사를 말한다.

[거창 지역의 소국]

초기 철기 시대 거창 지역에 소국이 존재했는지에 대한 문헌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거창 정장리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널무덤[목관묘]와 덧널무덤[목곽묘] 등과 같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보면 소국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 거창 정장리 유적에서는 2세기 후반~3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덧널무덤이 모두 230여 기 확인되었다. 특히, 86호 덧널무덤은 무덤구덩이[墓壙] 규모가 길이 630㎝, 너비 300㎝나 되는 대형급이다. 이는 소국의 수장급에 해당하는 매장 규모로 볼 수 있다. 국명(國名)에 대해서는 변한 12국 중의 ‘고순시국(古淳是國)’ 또는 ‘감로국(甘路國)’ 등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다.

소국은 청동기 시대 고인돌을 축조한 집단이 성장 발전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분포를 통해 내부 구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조면은 별도로 하고, 거창 분지의 고인돌 축조 집단은 8곳의 수계 권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에 거창 지역 소국은 8개 정도의 읍락을 가진 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천 수계(瀯川水系)를 중심으로 하는 지석묘 집단과 거창 정장리 유적의 위치, 삼국 시대 개봉 고분군의 위치 등을 고려해 보았을 때, 소국의 중심인 국읍은 현재의 거창읍에 존재하였을 것이다. 가조 분지에는 별도의 소국이 존재하다가 거창 분지의 소국과 합해졌을 것이다. 그 시기는 소국의 통합이 활발히 진행되었던 3세기 말부터 4세기 전반 대의 어느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삼한 소국 가운데 마한의 여러 나라들은 백제로 통합을 이루게 되고 진한 여러 나라들은 신라로 통합하게 된다. 그러나 변한의 여러 나라들은 하나의 나라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각각 성장하여 가야 여러 나라들로 성장하게 된다.

[거열국의 향방]

거창 지역에서 국명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최초의 국가는 거열(居烈)이다. ‘거열’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2, 잡지(雜志) 가야금조(加耶琴條)의 우륵(于勒) 관계 기사 속에서 보인다. 우륵이 작곡한 가야금곡(加耶琴曲) 12곡 가운데, 중국 남조(南朝)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이는 기악(伎樂)인 「보기(寶伎)」와 「사자기(師子伎)」 2곡을 제외한 10개 곡명은 가야의 지명 또는 국명을 표기하고 있다. 그 가운데 아홉 번째의 ‘거열(居烈)’은 현 거창 소재의 거열국(居烈國)을 가리킴이 틀림없다.

이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거창군은 본래 거열군(居烈郡)이었다.”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신라는 주변 지역을 복속한 후 그 지역명을 그대로 빌어 군현(郡縣)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리지의 기사는 신라 편입 이전 거창 지역에 존재했던 국명이 거열국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거열국의 향방에 대해 한국 사서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720년 일본에서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를 추측할 수 있는 기사가 있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기사에 ‘자타(子他)’라는 국명이 보이는데 거열에 대한 다른 표기로 판단된다. ‘자타’는 일본어로는 ‘고타’라고 읽는다. 이는 거타, 즉 거열에 대한 이표기라고 생각한다. 고대의 경우 편의상 한자의 음(音)을 빌어 표기했기 때문에 발음만 비슷하거나 같으면 어떤 한자를 사용하더라도 무방하였다. 신라 장군 이사부를 문헌 기록에는 ‘이사부(異斯夫)’라 표기하였지만, 당대 금석문인 단양 신라 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국보 제198호]에는 ‘이사부지(伊史夫智)’라고 쓴 예가 있어서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지리지 이하 지리지 기록들을 근거로 현 진주 지역을 거타=거열이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는 『고려사』 지리지 찬자가 이전 기록을 잘못 읽은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타와 거열은 모두 진주 지역이 아니라 거창 지역의 옛 지명 또는 국명이다.

『일본서기』 속의 자타국, 즉 거열국은 현 고령에 존재했던 대가야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멸망할 때까지 독립된 가야의 한 나라로 존재했다. 그리고 541년과 544년에는 이미 멸망한 가야 남부 제국의 부흥을 위한 국제 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독자적 자존 노력도 하였다. 거열국이 멸망하는 시기는 『일본서기』 흠명기 23년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자타국(子他國)’으로 표기된 거열국은 ‘가라국(加羅國)’으로 표기된 고령의 대가야국과 함께 562년 신라에 복속된다.

거열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 사료에서 그 모습이 보이는 것은 663년(문무왕 3)의 시기이다. 『삼국사기』 권6, 신라 본기에, 신라 장군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백제의 거열성(居列城)을 공격하여 7백여 급을 참수하고, 이어서 여러 성들을 공략하였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그런데 이때의 거열성은 ‘백제 거열성’으로 되어 있다.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660년에 이미 멸망했다. 따라서 이 시기 거창 지역은 백제 부흥 운동의 거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거열국의 경우 고령의 대가야가 멸망할 무렵인 562년 신라에 복속되어 신라의 땅이 된 지역이다. 이러한 거열성이 백제 영역으로 된 시기는 642년으로 보인다. 백제의 의자왕은 즉위한 다음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신라의 서쪽 일대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장악한다. 이 시기 이후 거창 지역은 백제의 영역이 되었을 것이다. 거열국의 경우 660년 백제가 멸망했지만 663년까지는 여전히 백제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로 보면 거창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존재한 시기는 642년부터 663년까지의 20여 년이다.

[신라와 거열주 또는 거열군]

신라는 663년 거열 지역을 장악한 이후 665년에는 이곳에 거열주(居列州)를 설치한다.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조, “5년 겨울에 일선주(一善州)와 거열주민(居列州民)들을 동원하여 하서주(河西州)로 군자를 운반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에서 거열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삼국사기』 권34 지리지 양주조(良州條) 기사를 참고해 보면 신라가 지역 거점과 넓은 지역을 아우르는 상주, 하주, 삽량주 등 3개의 주를 665년 설치한다. 그 가운데 하주의 치소를 거열 지역에 두게 되는 것이다. 이는 신라가 서쪽으로 나아감에 있어 거창 지역이 매우 중요한 길목이 되기 때문이었다. 신라는 685년(신문왕 5)에 주의 치소를 거열에서 청주(菁州), 즉 지금의 진주 지역으로 옮기게 된다. 신라가 더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거열주는 거열군으로 격하된다.

거열군은 757년(경덕왕 16)에 거창군으로 명칭이 바뀐다. 『삼국사기』 권34, 지리지 강주조(康州條)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신라는 통일 후 관직이나 지명 등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이른바 한화 정책(漢化政策)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거창’도 이전의 ‘거열’이나 ‘거타’의 음과 뜻을 고려하여 중국식 지명으로 바꾼 것이라 하겠다. 통일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은 주(州)를 제일 상급의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다수의 군(郡)과 현(縣)이 배치되어 있는, 이른바 주군현(州郡縣)의 체제였다. 8세기 거창은 강주(康州) 소속의 군이었다. 당시 강주의 주치(州治)는 오늘날 진주(晉州)였다. 거창군 소속 영현(領縣)으로는 여선현(餘善縣)과 함음현(咸陰縣)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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