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110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이칭/별칭 유학(儒學),유가(儒家),유도(儒道),공맹 사상(孔孟思想)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이덕진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행해지는 공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학문, 종교, 의례 및 활동 일반.

[개설]

유교(儒敎)는 공자(孔子)를 시원으로 하여 맹자(孟子)·순자(荀子) 그리고 주자(朱子) 등으로 계승되어 온 사상을 존경하고 숭앙하는 가르침이다. 무엇을 강조하는가에 따라서 유교(儒敎), 유가(儒家), 유도(儒道), 유학(儒學)이라고 한다. 유교는 중국에서 한대(漢代)에 이르러 무제(武帝)와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기 시작하여 BC 136년 국교로 선포되었다.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당(唐)의 한유(韓愈)에 의해 부흥되기 시작하여, 송대(宋代)에 이르러 왕안석(王安石)·구양수(歐陽脩)·사마광(司馬光) 등의 사대부(士大夫)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활되었다. 이후 유교는 주희(朱熹)·왕양명(王陽明)을 거쳐 청대(淸代)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유교는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철학, 사상, 윤리로서 정치, 문화, 교육 등 개인적·사회적 활동의 원리로 존재해 왔다. 유교는 한국 역사상 삼국 시대 전기에 도입된 이래 학교 교육과 사회 제도를 통해 발전하면서 개인과 가족의 윤리에서부터 국가의 정치사상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삶 전체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는 보편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거창 지역의 유교 역시 한국 유교 또는 유교 일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궁구하고, 그것을 윤리로써 실천하는 학문으로 발전해 왔다.

[거창 유교의 특징]

경상도 유교 문화의 대표 지역을 꼽으라면 좌안동(左安東), 우안음(右安陰)[현재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북상면 일대]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은 정통 유교의 고을이다. 거창 유학의 특징은 한 마디로 ‘선비 정신’이다. ‘충의와 절의를 숭상’함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거창은 남덕유산을 등에 지고 동쪽으로는 가야산, 서쪽으로는 지리산을 멀찍이 벌린 채 남쪽 저 멀리 황매산을 내다보며 한들이라 불리는 넓은 들판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수승대(搜勝臺)거창 신씨(愼氏), 건계정(建溪亭)거창 장씨(章氏), 위천의 초계 정씨(鄭氏), 갈천(葛川)의 은진 임씨(林氏) 등이 일찍이 세거지(世居地)로 삼아 서부 경남 굴지의 고을로 성장했다.

조선 전기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경상우도 영남학파를 형성할 때 거창에서는 동계(洞溪) 정온(鄭蘊)[1569~1641]이 조식의 학풍을 이어받아 거창 유림의 전통을 세웠다. 강직한 선비정신의 표본인 정온광해군 시절 영창 대군의 처형을 반대하다 제주 대정현에서 10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했고, 병자호란 때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려 하자 자신의 배를 찔러 자살을 시도하는 등 강직한 선비 정신의 표본을 보였다.

동계 이후에도 거창은 조선 시대 내내 굴지의 선비 고을이었다. 구한말 나라가 무너질 때 거창엔 면우(傘宇) 곽종석(郭鍾錫)[1846~1919]이 있었다. 면우남명을 잇는 영남학파의 적통이다. 3·1 운동 때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낸 조선 독립 청원서인 ‘파리 장서(巴里長書)’ 운동의 대표로 결국 2년형의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이내 세상을 떠났다. 한때 면우는 북간도로 망명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러나 면우는 내 땅에서 나라를 잃은 죄인으로 고행의 길을 가겠노라고 거절했다. 지금 거창 시내를 가로지르는 영천의 침류정 아래에는 면우의 ‘파리 장서비’가 세워져 있다.

[교육 기관]

1. 향교

고려 시대에는 지방 관학 기관으로 향교(鄕校)가 존재했다. 현재 가조면 용전 부락을 ‘향교 마을’이라 부르는데, 이는 고려 시대 향교가 있었던 데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시대 향교는 행정 구역인 부(府)·목(牧)·군(郡)·현(縣)에 설립된 성균관 아래의 지방 교육 기관으로,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다. 거창 향교는 조선 태종 15년(1415)에 처음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대성전(大成殿)을 짓고, 공자(孔子)의 위패를 봉안하여 봄가을로 제사지냈다. 1572년(선조 5)에 현감 서의(徐誼)가 중건하였으며, 1574년(선조 7)에 현감 장문한(張文翰)이 명륜당(明倫堂)을 지어 지방의 자제를 교육하는 관학(官學) 역할을 하였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23년(인조 1)에 대성전을 중건하였다. 1715년(숙종 41)에는 춘풍루(春風樓)를 건립하여 향교의 모습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 1748년에 도유사(道有司) 김천분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몇 차례의 중수·보수를 거쳐 강학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 뒤 1948년 군정 법령에 의해 향교의 재산이 향교 재단으로 귀속되고 1950년의 농지 개혁법으로 전답이 분배되어 계속 황폐해지다가 1974년 향교 직제에 따라 중건 및 보수가 시작되어 1976년 전면 복원되었다. 1983년 8월 6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2. 서원

서원(書院)은 선현의 존경과 후진 장학을 목적으로 세워진 사학 교육 기관이다. 서원의 구조는 선현을 봉사하는 사(祀)와 자제를 교육하는 재(齋)로 구성되었다. 서원이 발달하자 관학인 향교의 기능이 매우 떨어졌다. 서원의 교육 내용이 경학(經學)과 사장(詞章)을 중심으로 해 과거 시험 과목과 매우 밀접했기 때문이다.

거창의 서원은 17세기 중반에서 18세기 후반까지 약 150여 년 동안 14곳이 세워졌으며, 이 중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곳은 1737년(영조13)에 세워진 거창군 웅양면포충사(褒忠祠)뿐이다. 서원은 철폐령 뒤에도 세워지고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에도 세워진 곳이 있다. 철폐령 이전에 설립된 서원도 모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다.

거창군 원천면에 있었던 1635년(인조 13)에 세워진 역천 서원(嶧川書院), 거창군 가조면에 있었던 1661년(현종 2)에 세워진 도산 서원(道山書院), 거창군 주상면에 있었던 1664년(현종 5)에 세워진 완계 서원(浣溪書院), 거창군 거창읍에 있다가 현재는 가북면으로 옮긴 1686년(숙종 12)에 세워진 용원 서원(龍源書院), 거창군 가조면에 있었던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병암 서원(屛巖書院), 거창군 위천면에 있었던 1694년(숙종 20)에 세워진 구연 서원(龜淵書院), 거창군 북상면에 있었던 1703년(숙종 21)에 세워진 성천 서원(星川書院), 거창군 남하면에 있었던 1739년(영조 15)에 세워진 경충사(景忠祠) 등이 모두 철폐령 이전에 세워진 서원이다. 1924년 세워진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성암사(聖巖祠), 1980년에 세워진 거창군 거창읍의 덕천 서원 등은 모두 20세기에 들어와서 건립된 것들이다. 근년에 세워진 서원들은 모두 교육의 기능보다 선현을 기리는 사묘(祀廟)의 성격이 강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비록 서원(書院)이나 사(詞)란 이름을 쓰진 않아도 정(亭), 재(齋) 등의 이름으로 유림에서 제례를 올려 선현을 봉사하는 곳이 거창에는 많다. 유교적 전통이 아직 강하게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3. 서당

서당(書堂)은 백성들의 자제를 대상으로 한 사설 초등 교육 기관이다. 서당 교육의 목적은 향교 또는 서원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 교육이었다. 거창에는 1573년 세워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는 북상면 갈계리갈천 서당(葛川書堂)[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295호], 1870년에 건립된 운정 마을 현용재(見龍齋)를 비롯하여 마을마다 서당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부분 훼멸되었다.

4. 단체

성균관 거창 유도회는 그 창립 연도가 정확하지 않다. 1940년 무렵이 아닌가 추정될 뿐이다. 거창 유도회는 거창 향교 측과 협력하여 각종 유학의 전례(典禮), 향교 재산 환수 운동, 지역 청소년 예절 교육, 강연, 유학 관련 서적의 간행 등을 주관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거창 유학은 사화기에는 정여창(鄭汝昌)[1450~1504], 김굉필(金宏弼)[1454~1504] 등 영남 사림파(嶺南士林派)의 전통을 계승한 사림파에 속했고, 영남학파 중에는 주로 남명학파(南冥學派)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의 전형적인 산림처사(山林處士)요 강직한 선비의 표상인 남명 조식은 경의(敬義)를 신조로 이론보다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거창의 유림들은 나라가 어려울 때 마다 몸을 아낀 적이 없다. 한 마디로 거창은 충의의 고장, 선비의 고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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