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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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院撤廢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광철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868년 - 서원 철폐령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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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장소 | 죽수 서원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3 |
발생|시작 장소 | 포충사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산15 |
발생|시작 장소 | 도원 서원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915 |
[정의]
1868년부터 1871년까지 전국의 거의 모든 서원에 내려진 철폐령에 따라 전라남도 화순 지역의 모든 서원과 사우가 폐쇄된 사건.
[개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의 집권기인 1868년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지 않는 서원에 대한 철폐 조치가 시행되었고, 1871년에는 전국 47개의 서원과 사우를 제외하고 모두 철폐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전라남도 장성 지역의 필암 서원·태인 지역의 무성서원·광주 지역의 포충사 3곳만이 철폐령을 모면했고, 화순 지역의 서원과 사우는 이 시기에 모두 철거되었다.
[역사적 배경]
조선 중기부터 난립하던 서원과 사우는 후기에 들어 군역 회피와 탈세의 수단이자 붕당의 온상일 뿐 아니라 민간에 대한 수탈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1795년에 작성된 ‘전라도 관찰사 능주 쌍봉사 교폐 절목(全羅道觀察使綾州雙鳳寺矯弊節目)’이란 문서를 보면, 당시 능주목 관내에 있었던 죽수 서원(竹樹書院)과 포충사(褒忠祠)는 제사 때마다 인근 쌍봉사로부터 제수 용품과 종이를 꾸준히 납품받았고 이로 인해 쌍봉사의 고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폐단이 사회 및 국가 재정에 문제가 된다고 판단한 흥선 대원군의 주도로 서원과 사우에 대한 전면적인 정리 사업이 단행되었다. 이로 인해 서원과 직접적인 이해 관계에 있던 집단에서는 크게 개탄하였고 철폐령에 대한 부분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조정의 완고한 태도로 인해 1874년 충청북도 괴산 지역의 만동묘(萬東廟)를 복설한 사례를 제외하면 조선 말까지 복설된 사례는 없었다.
[철폐령으로 폐쇄된 서원들]
당시 철폐된 화순 지역의 서원과 사우 중 죽수 서원은 기묘사화 당시 능주로 유배를 왔다가 사사된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양팽손(梁彭孫)[1488~1545]을 배향했던 곳이다. 죽수 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사액된 곳으로, 조광조를 배향한 경기도 용인 지역의 심곡 서원보다 먼저 건립되었음에도 심곡 서원은 철폐령에서 살아 남은 반면 철폐를 피할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함께 철폐된 포충사는 임진왜란 중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화순 지역 출신의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위폐를 모신 사우였다. 사액 시기에 대해서는 1609년과 1611년으로 주장이 엇갈린다. 도원 서원(道源書院)은 기묘사화 때 동복현으로 유배 온 최산두(崔山斗)[1483~?]를 모시는 곳으로 1688년에 사액되었는데 철폐령의 회오리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결과]
서원 철폐령에 따라 화순 지역의 모든 서원은 그 터만 남기고 철거되었다. 서원이 철폐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 유림들은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단(壇)을 쌓아 제례를 이어 갔다. 화순 지역은 동학 농민 전쟁 등 혼란기로 1900년대 이후부터 이런 풍조가 시작되었다. 철폐된 서원과 사우의 자리에 유허비를 세우는 관행도 이 무렵부터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원과 사우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주로 특정 문중들을 중심으로 재개되었다. 그러나 재원 부족으로 실제 복설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화순 지역에서는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문중의 추렴과 지방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죽수 서원·포충사·도원 서원 등 옛 서원과 사우의 복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