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9A01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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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병구 |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만 빼꼼이 열린 그 곳에는 돌부처가 산다.
6조각의 몸은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 거무스름하지만, 하얀 얼굴은 슬그머니 웃음 지으며 그렇게 살고 있다. 머리에는 큰 갓을 쓴, 인체의 비례도 맞지 않는, 부처님을 묘사한 수법도 정밀하지 못한, 그래도 웃음 지으며 천년을 서있는 부처님이 산다. 왔다가는 숱한 사람들이 부처님을 향해 입방아를 찧어도 하얀 얼굴을 붉히지도 않고 허물어지다만 석실 안에 서 있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 시에 사찰이 불타면서 석실도 불에 탄 흔적이 역력하건만 미륵부처님은 불에 그을린 흔적도 없이 뽀얀 얼굴에 맑은 미소를 띠고 서 있다.
이곳 미륵사지를 정비 복원하기 위하여 1977년부터 1990년까지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글씨가 새겨진 기와, 그림이 그려진 평기와, 막새기와가 출토되었으며 그 밖의 조사에 의하여 사찰의 건립 연대는 10C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미륵부처님은 조각 수법이나 불상 양식을 종합한 결과 11C에 조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석실의 존재로 미루어 이견이 있으나, 거의 석굴사원의 형태로 추정된다.
신라 말 경순왕 김부가 이미 국운이 다한 것으로 판단하여 고려의 왕건에게 나라를 바치자 그의 아들 마의태자와 딸 덕주공주가 이에 반대하여 금강산으로 가던 중 이곳에 머물러 망국의 한을 미륵부처님 조성과 월악산 마애불 조성으로 표현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부처님은 북향하여 험준한 산세를 뚫으며 이어지는 송계계곡을 바라보며 알듯 말듯한 미소를 띠며 한없이 바라보고 있다. 이는 사찰의 위치가 계립령이라는 영남과 기호를 연결하는 요지 밑에 자리 잡고 있어 생긴 설화가 아닌가 한다.
미륵부처님 발치에는 가운데가 움푹 파인 연화문 무늬가 새겨진 석재가 있다. 가운데 오목하게 파인 부분에는 물이 고여 있다. 미륵리 주민들에 의하면 이를 장군수(將軍水)라 하며 이를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이를 과시하듯 돌 가운데 뚫린 흔적이 없음에도 샘이 솟듯 물이 항상 일정량을 유지하고 있어 신비로움을 보여준다.
석실과 미륵부처님 사이는 채 2m가 되지 않는다. 그 좁은 공간에 큰 바위 하나가 떡 버티고 있다. 미륵리 병자년 수해(1876) 시 많은 사람이 죽고 집들이 파손되어 떠내려가고 할 때 이 큰 돌도 석실로 굴러 떨어졌지만 미륵부처님은 전혀 다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실제 보면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석실과 미륵부처님 사이에 사람이 간신히 빠져나갈 공간 정도를 남기며 자리하고 있다. 이 모습은 미륵부처님의 영험함을 설명하는 예로 자주 언급되고 있다.
대부분의 옛 절터는 황량함을 보이고 있지만, 이곳 미륵사지는 의연하게 버티고 선 부처님의 밝은 얼굴이 따뜻함을 전하고 있어 오히려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오늘도 미륵부처님은 그냥 씩 웃으며 쳐다보는 오만한 인간 군상들을 향해 티 없이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맑은 얼굴로 맞이하고 있다. 보물 제96호라는 거추장스런 명예도, 높이 10여m 라는 거대함도 의식하지 않고 미륵부처님은 미륵리 한가운데, 그렇게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