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제일의 명승, 원학동과 수승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89
한자 南道 第一- 名勝, 猿鶴洞- 搜勝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석기

[정의]

남도 제일의 명승으로 꼽히는 거창군 원학동과 그 주변 풍광 및 선비들의 문화 이야기.

[개설]

원학동은 조선 시대 안의현(安義縣)에 속한 동천(洞天)으로, 화림동(花林洞)·심진동(尋眞洞)과 함께 이른바 ‘안의 삼동(安義三洞)’으로 일컬어지던 곳이다. 안의 삼동은 백두 대간의 동남쪽 경사면에 형성된 계곡으로 산수가 빼어나 예로부터 영·호남 최고의 명승으로 알려졌다. 안의 삼동 가운데서도 원학동은 동천이 넓고 크며 수승대·사선대 등 빼어난 명승이 있는 데다 깊은 산속에 위치하여 무릉도원으로 일컬어졌으며, 효자로 정려가 내린 임훈(林薰) 형제가 살던 갈천동(葛川洞)과 대명 의리를 지킨 정온(鄭蘊)이 만년에 은거한 모리재(某里齋) 등 선비 문화 유적이 많아 답사 일번지로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남도 답사 일번지, 안의 삼동]

조선 선비들은 속세의 티끌에 물들지 않고 성명(性命)을 온전히 보전하는 것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주희처럼 산림에 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欲)을 물리치려 하였다. 선비들은 공자가 산과 물을 보며 인(仁)·지(智)를 체득한 정신을 계승하여 산수를 본성을 관조하는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산수유람을 아름다운 경관을 구경하러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인·지를 체득하러 가는 구도 여행으로 여겼다.

이런 까닭에 조선 선비들이 생각한 답사 일번지는 자연경관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선비들은 속세의 티끌이 없는 청정한 곳으로서 흉금을 상쾌하게 함은 물론, 산과 물이 어우러져 본성을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을 최고의 명승으로 꼽았다.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안의 삼동이다.

안의 삼동은 안의현(安義縣)에 속한 화림동(花林洞)·심진동(尋眞洞)·원학동(猿鶴洞)을 가리킨다. 화림동은 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서하면·서상면 일대이고, 심진동은 현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용추 계곡의 동천이며, 원학동은 현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위천면·북상면 일대다.

조선 후기 이조 판서를 지낸 신좌모(申佐模)는 “안의 삼동의 명승이 기이하고 빼어나기로 영남에서 으뜸인 줄 참으로 알겠구나.”라고 하였다. 우의정을 지낸 심상규(沈象奎)는 “안의 삼동의 명승은 영·호남에서 으뜸일세.”라고 하여, 남쪽 지방에서 가장 빼어난 곳으로 안의 삼동을 지목하였다.

안의 삼동 가운데 화림동은 꽃과 숲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이다. 안의면 소재지에서 북상면으로 올라가는 골짜기에 농월정(弄月亭), 동호정(東湖亭), 군자정(君子亭), 영귀정(詠歸亭), 거연정(居然亭) 등 아름다운 정자가 즐비하다. 이러한 정자들은 산수에 은거하여 심신을 수양하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고자 하는 성리학적 정신이 깃들어 있다.

화림동의 대표적 명승은 농월정이다. 농월정은 인근에 살던 박명부(朴明榑)가 지은 정자다. 박명부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인물로, 원학동 출신 정온과 절친하게 지냈다. 박명부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자 낙향하여 두문불출하였는데, 달이 비친 시내의 못을 ‘월연(月淵)’이라 하고, 정자의 이름을 ‘농월정’이라 하였다. ‘월연’이라 한 것은, 이백(李白)의 「고풍 사수(古風四首)」에 “제(齊)나라에 걸출한 선비가 있었으니, 노중련(魯仲連)이 특별히 고상하고 오묘했네. 명월이 바다 속에서 떠올라, 하루아침에 광명을 열었네.”라는 시구를 보고 느낀 점이 있어서였다. 노중련은 전국 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가 6국을 병합하려 할 때 “진나라 임금을 섬기느니, 차라리 동해 바다에 빠져 죽겠다.”고 한 인물이다. 박명부가 ‘월연’이라 한 것은 노중련의 정신이 깃든 달을 가슴에 품은 것이다. 그리고 정자의 이름을 ‘농월정’이라 한 것은 노중련의 정신이 깃든 명월과 함께 노닐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심진동은 진경(眞境)·진인(眞人)을 찾는 동천이라는 뜻이다. 안의면 소재지에서 거창 방면으로 2㎞쯤 올라가다 보면 용추 폭포로 향하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골짜기가 용추 계곡이며 예전에 심진동이라 부르던 곳이다. 심진동의 대표적인 명승은 용추 폭포와 장수사(長水寺)인데, 장수사는 지금 폐허가 되어 일주문만 남아 있다.

‘원학동’이란 명칭은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고문진보』에 실린 「북산 이문(北山移文)」에 “초막이 텅 비어 밤에는 학이 원망하고, 산인이 떠나가자 새벽에 원숭이가 놀라네.”라는 문구에서 연유한 것으로, 은자가 숨어 사는 산중을 의미한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원학동 서쪽에 있는 금원산의 ‘금원(金猿)’과 원학동에 살았다고 하는 ‘청학(靑鶴)’이 합해져 ‘금빛 원숭이’와 ‘푸른 학’이 사는 속세와 동떨어진 고을이라는 뜻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설이다. 이 두 설 모두 은자가 사는 곳을 상징하기 때문에 원학동은 은자가 숨어 사는 동네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원학동의 문화 원형들]

원학동의 범위는 마리면 영승 마을에서 시작하여 진동암(鎭洞巖)을 거쳐 위천면 소재지에 있는 척수암(滌愁巖)·수승대(搜勝臺)에 이르고, 다시 갈천동(葛川洞)을 거쳐 월성 계곡 상류의 사선대(四仙巖)[송대(松臺)]에 이르는 공간을 통틀어 말한다. 원학동의 중심지는 수승대다. 수승대를 중심으로 서남쪽 금원산 골짜기에 문바위와 가섭암지유안청 폭포가 있고, 서북쪽 북상면에 효자로 정려가 내린 임훈(林薰)·임운(林芸) 형제의 유적지가 있고, 월성 계곡강선대(降仙臺)·모암정(帽巖亭), 분설담(噴雪潭), 사선대(四仙臺) 등 명승이 있고, 강선대 마을 뒤쪽에 정온이 은거한 모리재(某里齋)가 있다.

원학동의 문화 원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대부들이 은거하여 수학하던 공간이다. 안의 삼동 중 원학동은 화림동·심진동과 확연히 구별되는 사대부들이 세거한 동천이라는 특징이 있다. 이는 경제적 기반이 되는 농지가 어느 정도 있기 때문이다. 둘째, 현실 세계에서 찾은 무릉도원이다. 16세기 오숙(吳䎘)은 「유수송대기(游愁送臺記)」에서 원학동을 “옛날 처사 갈천 임훈이 살던 곳으로, 세상 사람들은 원학동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여 처사가 은거하는 무릉도원으로 문화적 특징을 포착하였다. 셋째, 무릉도원의 이미지와 연관하여 세속의 분주함을 멀리하여 삶의 여유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17세기 오국헌(吳國獻)원학동을 유람하며 지은 「원학동 도중(猿鶴洞道中)」이라는 시에서 일신의 한가로움, 마음의 한가로움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노래하였다. 넷째, 효자로 정려가 내린 임훈임운 형제의 효성과 우애가 깃든 고장이다. 임훈·임운 형제는 아버지의 상을 당해 시묘를 할 적에 한 번도 여막 밖으로 출입하지 않아 1564년 정려를 하사받았다. 다섯째, 절의(節義)의 고장이다. 17세기 정온이 대명 의리를 지켜 은거함으로써 원학동은 절의의 고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원학동의 꽃 수승대]

원학동의 중심이며 꽃이라 할 수 있는 수승대는 유구한 역사를 거치면서 네 가지 이름이 붙었다. 삼국 시대에는 떠나가는 사신을 수심으로 전송하던 곳인지라 수송대(愁送臺)로 불렸고, 조선 시대로 들어와서는 거북바위의 형상을 따서 암구대(巖龜臺)로 불렸고, 1543년 이황(李滉)수승대(搜勝臺)로 개명하였으며, 신권의 후손들이 차지하고 난 뒤로는 신권의 호를 따서 요수대(樂水臺)라 불렀다.

선인들의 품평에 따라 수승대의 경관이미지를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안의 삼동 가운데 가장 빼어난 곳이다. 둘째, 유리 세계와 같이 맑고 밝다. 셋째, 맑은 시내와 아름다운 산과 높은 바위가 잘 어우러진 곳이다. 넷째, 맑고 수려한 경관과 그윽하고 미묘한 풍치가 있는 곳이다. 다섯째, 명소가 명인을 만나 명승이 된 곳이다.

수승대는 본래 명칭이 수송대였는데, ‘수송대’라는 명칭에도 여러 설이 전한다. 첫째는 신라·백제 시대 이곳에서 사신을 전송했는데, 사신을 떠나보내는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수송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이다. 둘째는 수송(愁送)은 송수(送愁)처럼 ‘근심을 날려 보내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 수송대의 빼어난 경관이 근심을 잊게 하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다. 셋째는 신라 시대 중국으로 가는 사신을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이곳까지 나와 전별했기 때문에 수송대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 세 가지 설 가운데, 첫째는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역일 때 생겨난 고사고, 셋째는 통일 신라 때에 붙여진 이름이며, 둘째는 역사적 사실이 잊힌 뒤에 나아가 붙여진 이름이다.

수송대가 ‘수승대’로 불리게 된 데에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이황은 1543년 1월 영승 마을에 들러 장인 권질(權礩)의 회갑연에 참석했다가 수송대로 가서 임훈·신권을 만날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조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래서 서둘러 상경하면서 ‘수송대’를 ‘수승대’라 개명하고 시를 한 수 지어 보냈다. 그 시에 “수승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바꾸니, 봄을 맞아 그 경치가 더욱 아름답네. 먼 숲에선 꽃들이 피어나려 꿈틀대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눈이 그대로 남아 있네. 명승을 보고 싶어도 가 보질 못하니, 오직 상상의 회포만 더할 뿐이라네. 훗날 한 통의 술을 가지고 다시 와서, 큰 붓으로 운무 낀 암벽에 글을 쓰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신권이황이 개명한 이름이 좋다고 기뻐하였지만, 임훈은 생각이 달랐다. 유구한 역사가 전하는 이름을 외지인이 와보지도 않고 이름을 바꾼 것에 대해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임훈은 「수송(愁送)의 뜻을 풀이하여 제군에게 보임」이라는 제목으로 “꽃은 강 언덕에 가득하고 술은 술통에 가득한데, 유람하는 사람들이 소매 맞대고 분주히 오가네. 봄이 장차 저물려 할 때 그대도 장차 떠나려 하면, 봄 보내기가 시름일 뿐 아니라 그대 보내기도 시름일 텐데.”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는 ‘수송대’라는 명칭이 갖고 있는 의미를 넌지시 풀이하면서 만나지 못한 서운함을 드러낸 것인데, ‘수승대’라는 이름을 수용할 수 없다는 의도가 들어있다.

[원학동에 깃든 이야기들]

원학동 입구의 영승 마을은 원래 영송촌(迎送村)이었는데 이황이 이름을 바꿨다. 이황은 이 마을 사람 전식(全軾)이 지은 시냇가 정자를 사락정(四樂亭)이라고 명명했는데, 농사를 지어 곡식을 생산하는 즐거움, 누에를 쳐 옷감을 짜는 즐거움, 시내에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즐거움, 힘들이지 않고 나무를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모두 누릴 만한 곳이라는 뜻이다.

장풍 삼거리 위쪽 시냇가에 있는 진동암은 원학동의 안쪽 관문에 해당하는데, ‘원학동(猿鶴洞)’이라는 각자가 있다. 또 이곳은 조선 전기 조광조의 문인 조학(趙謔)이 노닐던 곳이기도 하다. 진동암 옆 시내를 따라 형성된 길을 장풍로라 한다. 장풍로는 덕유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기다란 시내가 장풍교 아래로 흘러간다. 장풍로에는 장풍숲, 장풍교, 장풍 마을이 있다.

구연동(龜淵洞)은 거창군 위천면 소재지 일대를 가리킨다. 이곳의 명승 및 유적은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정온의 고택이고, 하나는 척수암(滌愁巖)이고, 하나는 수승대 및 그 일대의 유적지이다.

정온조식(曺植)의 문인 정인홍(鄭仁弘)에게 수학하였으며, 161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614년 영창 대군을 죽인 정항(鄭沆)의 처형을 청했다가 제주로 유배되었다. 인조가 즉위한 뒤 다시 등용되어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화친에 반대하다가 항복하기로 조정의 논의가 결정되자 자결을 시도하였다. 가까스로 소생한 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집 근처의 모리에 은거하였다. 정온 고택에는 솟을대문에 ‘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는 정려가 있다. 정온영창 대군의 처형을 반대하여 충절을 보였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친을 반대하여 절의를 드러낸 인물이다. 인조정온의 충절을 기려 정려를 내렸다.

척수암은 사람들이 쉬어 가며 근심을 풀던 곳이다. 바위 위에 올라 보면 넓은 호수와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수승대 주변에는 유적이 많은데, 대표적인 곳이 구연 서원(龜淵書院)관수루(觀水樓), 요수정(樂水亭), 그리고 수승대 주변의 기이한 바위와 각자들이다. 구연 서원신권·성팽년·신수이를 제향하고 있는 서원으로 1694년 구연재(龜淵齋)를 서원으로 승격한 것이며, 관수루구연 서원의 문루로 1740년에 창건한 것이다. 구연서원 건너편 시냇가 언덕에는 있는 요수정신권이 노닐던 정자로 『논어』의 ‘지자요수(智者樂水)’에서 취한 것이다. 『구연 서원지』에는 수승대 주위의 빼어난 경관을 구연동 19경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 있다.

금원산 자연 휴양림에는 문바위, 가섭암지, 마애 삼존 불상(磨崖三尊佛像), 유안청 폭포 등 명승이 있다. 문바위는 가섭암의 일주문 역학을 하던 큰 바위고, 가섭암지 위 자연 석굴 안의 암벽에는 보물 제530호로 지정된 마애 삼존 불상이 있다. 마애 삼존 불상은 중앙에 아미타여래불, 오른쪽은 관세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추정되며 1111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안청 폭포는 원래 가섭동 폭포로 불렸는데, 조선 시대 고을 유생들이 공부하는 유안청(儒案廳)이 이곳에 설치되어 ‘유안청 폭포’로 불리게 되었다.

수승대 위쪽 북상면은 옛날 갈천동으로 불리던 곳이다. 길가에 ‘갈천동문(葛川洞門)’이라고 쓴 표지석이 있으며, 조금 위 왼쪽 시내 건너편에 용암정(龍巖亭)이 있다. 이곳은 임훈의 후손 임석형(林碩馨)이 노닐던 곳인데 경관이 빼어나다.

북상면 소재지에는 임훈·임운 형제의 효자 정려 비각 및 고가가 있다. 갈천동에는 임씨(林氏)가 대대로 살았는데, 임훈 형제에게 정려가 내린 뒤 효자 마을로 거듭났다. 또한 갈천동에는 임훈이 강학하던 갈천 서당이 있으며, 서당 옆 시냇가에는 임훈이 노닐던 갈계숲이 있다. 이 갈계숲에는 임훈이 노닐던 가선정(駕仙亭), 임훈의 동생 임영(林英)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도계정(道溪亭), 임운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병암정(屛巖亭)이 있다.

북상면 농산리 시냇가에 모암정과 강선대가 있다. 모암정은 임훈의 후손 임지예(林之藝)가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며, 강선대는 경관이 빼어나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고 하는 곳으로 『안의 읍지』에 의하면 환선대(喚仙臺), 유선암(遊仙岩), 회상담(回觴潭), 청송정(淸松亭) 등이 있었다고 한다.

강선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약 2㎞쯤 오르면 산 중턱에 정온이 은거한 모리재가 있다. 정온이 1637년 남한산성에서 돌아온 뒤 이곳에 은거하였다. 정온이 이곳에 은거한 것은 ‘모리(某里)’라는 명칭 때문이었는데, 은거하던 집의 이름도 모리재라 하였다. 모리재 왼쪽 방에는 ‘구소(鳩巢)’라는 현판이, 오른쪽에는 ‘채미헌(採薇軒)’이라는 현판이 있다. ‘구소’는 비둘기 집이라는 뜻이며, ‘채미헌’은 고사리를 캐 먹고 사는 사람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온은 명나라가 망한 뒤 청나라 책력을 보지 않고 춘추대의를 따라 대명 의리를 지켰다. 그래서 후학들은 그곳에 황명각(皇明閣)과 화엽루(花葉樓) 등을 건립하여 정온의 만세 청풍(萬世淸風)을 기렸다. 특히 구한말 도가 망하고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했을 때, 유학자들은 이곳을 찾아 도를 지키기 위해 절의를 다짐하기도 하였다.

모암정에서 상류로 5.3㎞쯤 오르다 보면 창선리 협곡 시내에 분설담(噴雪潭)이 있다. 분설담은 평평한 너럭바위에서 하얀 물방울을 내뿜으며 시냇물이 쏟아져 내리는 못이다. 이 인근에 우거하던 송준길(宋浚吉)이 은거하면서 붙인 이름이라 전한다.

분설담에서 5㎞쯤 더 올라가면 협곡 오른쪽에 사선대(四仙臺)가 나오는데, 일명 송대(松臺)라고도 한다. ‘송대’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하다. 하나는 송준길이 이 근처에 은거하였기 때문에 ‘송기(宋基)’ 또는 ‘송대(宋臺)’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 설이다. 그러나 ‘송대(宋臺)’라는 명칭은 문헌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조식이 노닐던 곳에 후학들이 대를 쌓고 사당을 짓고서 소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송대라고 불렀다는 설이다. 이 설은 17세기 허강(許堈)이 지은 「송대기(松臺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이 송대를 그린 그림이 2점 남아 있는데, 하나는 김윤겸(金允謙)이 그린 것이고, 하나는 김희성(金喜誠)이 그린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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