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벽화가 거창 둔마리 산골에 그려진 이유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81
한자 高麗 時代 壁畵- 居昌 屯馬里 - - 理由
영어공식명칭 Tomb of Mural Painting at Geochang Doonma-ri
이칭/별칭 고려 벽화 무덤,귀신 나오는 무덤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산298-1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구본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고려 시대 - 고려시대 벽화가 거창 둔마리 산골에 그려진 이유 ,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조성 추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1년 -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발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2년 -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발굴 조사 실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4년 9월 5일 -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사적 제239호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종합 학술 대회 개최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산298-1에 있는 고려 시대 벽화 무덤인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이 그려진 이유.

[개설]

옛 무덤 내부에 그리진 벽화는 고대 회화의 제작 과정, 표현 기법과 수준, 안료 및 아교 제조술 등 여러 가지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고대 사회의 생활 풍속·신앙·종교·사상 등을 생생하게 담아 내고 있어 역사·문화 자료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우리나라 벽화 고분은 각저총(角抵塚)·무용총(舞踊塚)으로 유명한 고구려 벽화 고분이 유명하다. 평양·안악 지역에 68기, 집안·환인 지역에 23기 등 90여기가 조사되었다. 벽화 고분은 대략 3세기 말에서 7세기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다. 벽화의 내용과 구성 방식, 표현 기법, 분위기 등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다.

백제의 벽화 고분으로는 능산리와 송산리 고분 벽화가 있고, 신라는 영주 순흥면에서 1990년에 발견되었다. 경상북도 고령군 고아동 고분에서는 가야 시대의 벽화 고분이 발견되었다. 삼국 시대 고분 벽화의 주제로는 보통 생활 풍속·장식 무늬·사신(四神) 등이 선택되었다. 생활 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 벽화에는 주로 묻힌 자의 삶에서 기념할 만한 것과 풍요로운 생활 모습을 그려졌다.

고려 시대의 벽화 고분으로는 개성의 현릉(玄陵), 개풍의 수락암동 1호분(水落岩洞 1號墳), 장단의 법당방 석실분(法堂坊 石室墳), 파주의 서곡리 고려 벽화묘(瑞谷里 高麗 壁畫墓), 거창의 둔마리 벽화 고분(屯馬里 壁畫 古墳) 등이 남아 있다.

고려 시대 귀족들은 무덤 크기에서 왕릉 같은 큰 규모의 무덤은 만들지 못했지만 규모를 작게 한 석실분을 축조하였다. 수락암동·법당방 석실분에는 회칠을 한 벽면에 성신도(星辰圖)[별자리 그림]와 십이지신상들이 그렸고, 서곡리 벽화묘는 회를 칠하지 않고 직접 돌 표면에 십이지신상을 그리고 천장에는 별자리를 그렸다. 개성 부근의 고려 벽화가 모두 십이지신상과 별자리인 점에 반해 거창 둔마리 벽화는 주악선녀도(奏樂仙女圖)와 남녀 무용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 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만 유일하게 당시 수도인 개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위치하여 1971년 발견 당시 고고미술학계의 주목과 흥분을 낳게 했다. 그 해 중앙 유력지[한국일보 등] 국내 주요 10대 뉴스에 선정되었으며, 거창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국 미술 전집』과 『한국 미술 소사』는 물론 중학교 미술 교과서와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한때 소개된 일이 있었다.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은 지방 문화의 토속성과 소박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1974년 9월 5일 국가 사적 제239호로 지정되었다.

[둔마리 벽화의 발견]

남덕유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에 에워 쌓인 거창은 산간오지이지만 비옥한 농토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삶의 터전을 이루었고 중앙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여 지방 호족이 남긴 토속적인 문화유산이 융성한 곳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 등 혼란기를 틈타 유서 깊은 문화유산들이 일대 수난을 겪게 된다.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도 이러한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1960~70년대 거창도 불법 도굴이 성행하였고, 이 중 도굴꾼[신○○, 거창읍 거주, 작고]이 벽화 고분을 도굴한 뒤, 시장에서 막걸리를 마시면서 어디 산속 무덤에 들어 갔는데 내부에 여자 귀신이 머리를 풀고 두 눈을 부릅뜨고 쳐다 봐[벽화 고분 동실 주악천녀] 혼비백산하였다가 다시 도굴 하였다는 무용담을 하고 다녔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시 향토 사학자 최남식(崔南植)[거창 박물관 설립자]·김태순(金泰錞)[거창 박물관 설립자] 두 사람이 현장을 확인하여 문화재 관리국에 신고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71년 11월이며, 김원룡(金元龍), 김정기(金正基) 박사가 현지 답사를 하였다. 1971년은 공주 무령왕릉이 여름에 발굴되어 떠들썩한 해로 연말의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발견도 세상의 큰 이목을 받았다. 당시 중앙 언론에서 대서특필하였고, 다음 해 1972년 12월에 발굴 조사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둔마리 벽화 고분 유물은 시신을 안치한 목관 일부와 빼 조각 외에는 남아 있지 않다. 당시 도굴꾼이 유물을 반출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도굴꾼이 옥살이를 하면서도 이 사실을 끝까지 말하지 않아 사실 파악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도굴꾼이 2013년에 사망하여 더 이상 벽화 고분 출토 유물을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빠졌다. 주변에 따르면 고려 청자 10여점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알 수 없다. 채색 벽화는 발굴 당시 이화 여자 대학교 진홍섭 교수가 적외선과 컬러 필름으로 촬영하여 보존되고 있다.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의 위치]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의 위치는 행정 구역상으로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둔마리 산298-1이다. 거창읍에서 동쪽으로 7㎞정도 떨어진 금귀봉(金貴峰)[710m] 남쪽 구릉[450m]에 위치한다. 이곳은 일찍부터 마을 주민들이 속칭 석장(石葬)골, 재궁(梓宮)골이라고 불렸던 곳이다. 아마도 고분 때문에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석장골’이란 곧 돌로 만든 무덤이 있는 곳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무덤 일대는 풍화된 화강암 야산이며, 고분 뒷면에 가조면 거주 연안 이씨의 묘소가 있고 남쪽 능선을 따라 2~3기의 석실묘가 방치되어 있다. 발견 당시 이들 무덤들도 벽화 고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었으나 조사 결과 모두 조선 시대 무덤으로 알려졌다.

벽화 고분을 품고 있는 금귀봉(金貴峰)은 거창 분지와 가조 분지 중앙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신령스럽고 신성하게 여긴 봉우리로 인식된 거창의 이름난 영산(靈山)이다. ‘금귀(金貴)’라는 지명에서도 그 의미가 잘 나타나 있다. 산이 신령스럽고 거북형상을 지니고 있어 금구산(金龜山) 또는 구잠(龜岑)이라 하였으며, 우뚝 솟은 봉우리 모양으로 탕근산이라고도 하였다. 산 봉우리에는 신라 왕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112] 때 쌓았다고 전하는 산성과 조선 시대 봉수(烽燧) 흔적이 남아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금귀봉 산 곳곳은 예로부터 명당(明堂)으로 이름난 곳이 많았으며,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이 위치하여 더욱더 산의 신령스러움을 더해 주고 있다.

[벽화 고분의 형태 ]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은 통일신라 때 유행했던 형식의 방형 호석분(方形 護石墳)으로 무덤방은 여러 장의 큼직한 판석으로 짠246×98×92㎝ 크기의 석관형 석실을 남북 방향으로 2개의 방을 나란히 안치한 형태이다. 외형은 금귀봉 남쪽 산줄기 능선상의 좁은 평지 위에 방형(方形)으로 지대석(地臺石)을 설치하여 위에 호석(護石)을 올려 놓고 봉토를 덮은 모양이다. 봉토는 적갈색의 사질 점토로서 석곽 천정석의 상면까지 덮혀 있으며, 천장 봉토 두께는 18㎝정도이다. 석축의 동서(東西) 양쪽 밖에는 문인석(文人石)이 배치되어 있다. 서쪽 석인은 가슴 윗부분이 절단되고 하반신만 남아 있고, 동쪽 문인석은 완전한 형태로 높이 232㎝이다. 문인석은 두관(頭冠)을 착용하고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표현하였으나 몸체는 간략화시키고 가슴 가운데에는 연주(連珠)를 뚜렷하게 나타냈다. 근처 아래쪽 골짜기에 가슴 위에 양팔을 올려 두 손으로 칼을 쥔 하반신만 남아 있는 무인상 1구가 묻혀 있었는데,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과 관련 여부는 알 수 없다.

무덤방[석실]은 장방형 형태이며 중간 벽으로 동서 두 방으로 구분하였다. 중간벽 중앙에는 높이 40㎝, 폭 35㎝의 투창 구멍이 뚫혀 있다. 구멍은 사후 세계 대화의 창으로 여겨진다. 동서 양 석실의 크기는 각각 대략 폭 0.9m, 길이 2.4m, 높이 0.9m이다. 모든 벽은 다듬은 화강석 판석을 사용하였고, 천장을 제외하고 모두 전면에 회를 칠 한 위에 채색 벽화를 그렸다. 기법은 회칠이 마르기 전에 단숨에 그리는 프레스크 기법(fresco painting)이다. 발굴 당시 서쪽 무덤방에는 목관이 한 개 들어 있었으나 동쪽은 비어 있었다. 1972년 발굴 조사 뒤 외형은 원래대로 복원하였다. 고분은 벽화의 안전한 보존을 위해 폐쇄된 상태이며, 최근에 고분 진입로와 주차장을 만들어 접근성을 좋게 하였다. 현재 거창 박물관에 실물 크기의 벽화 고분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벽화의 내용]

거창 둔마리 고분의 벽화는 동서 각 무덤방 각 벽에 회칠을 한 뒤에 그렸다. 그림은 천녀상(天女像)과 주악상(奏樂像) 그리고 남녀가 혼합된 무용도(舞踊圖)이다. 동실(東室) 동벽에는 천녀들이 그려져 있으며, 크게 남북의 두 곳으로 나누어 남쪽에 3명, 북쪽에 2명이 그려져 있다. 두 사이에는 약 60㎝ 정도 공간이 떨어져 있지만, 이 빈 공간에 원래 1명이 그려져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남쪽에 그려진 천녀는 높이는 약 50㎝이며, 빗어 올려 얹은 머리에 둥근테 모양의 관을 썼고 관의 양 옆에 깃 같은 장식꼬리가 뻗어 날리고 있다. 얼굴은 타원형에 눈동자가 뚜렷한 소녀상이며 귀에는 귀걸이를 달았다. 옷은 둥근 깃에 소매 끝을 팔목에서 잘라맨 상의에 발목이 꼭 끼는 바지를 입었고 허리에는 띠가 감겨 있으며, 한 끝이 왼쪽 다리 위로 드리워져 있다. 조그만 장구를 가슴에 달고 오른손으로 고면(鼓面)을 때리고 왼손은 옆으로 뻗어 장구를 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상반신은 정면을 향하고 있으나 하반신은 거의 허리를 직각으로 돌렸고, 오른쪽 다리는 뒤로 꺽어 올리고 왼쪽 다리로 구름 위에 서서 장구를 치며 춤을 추는 모습이다. 남쪽에서 두 번째 천녀상은 보살들의 화관과 비슷한 장식을 하고 있어 불상처럼 보인다. 그밖의 천녀상들은 머리에 화관을 쓰고 손에 지물을 들거나 춤추는 듯한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벽에서는 적외선 촬영을 하면서 세로 3행의 묵서가 확인되었다. 이는 당시 부적에 쓰이던 주술문이나 범(梵)자를 아무렇게나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벽에는 서쪽 실과 통하는 투창 부근에 주악천녀상이 그려져 있다. 형상은 한 손에 피리를 들고 또 한손에는 접시에 과일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들고 있으며 옷자락은 불상에 나타나는 문양으로 되어 있고 어깨에 얇은 천을 걸쳐 늘어뜨린 형상이다. 서실에는 서벽 남반부에만 인물도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벽화 중 천녀상들은 동실의 주악천녀상들과 비슷하나 북단의 것은 뚜렷한 수염으로 보아 남자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그림의 내용은 묻힌 사람의 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고 안주하게 하기 위하여 축복해 주고 있는 모습들로 불교적인 요소가 기본을 이루며 여기에 도교적인 성격이 가미된 보다 현실적인 종교화라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린 방법은 먼저 묵선으로 윤곽을 그린 뒤 머리는 검게, 옷은 토황색 또는 황갈색 일색으로 엷게 칠했다. 벽화는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벽면이 마르기 전에 단숨에 그린 자유롭고 생기가 도는 필선으로 되어 있어 색채가 맑고 연하여 수채화 같은 인상을 준다.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의 주인공 ]

고려 시대 거창은 인근 합주[지금의 합천]에 예속될 정도의 속현(屬縣)으로 강력한 정치 집단을 가진 지역이 아니었고, 중앙 세력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산간오지였다. 또한 뚜렷하게 주목할 만한 사건과 인물도 등장하지 않은 시기였다. 그런데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은 가까운 진주 평거동에 있는 방형 돌방무덤[석실묘]과 유사한 형태로 당시 귀족이나 호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 내부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예사로운 무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1971년 같은 해에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처럼 지석(誌石)이나 출토 유물이 없기 때문에 누구의 무덤인지,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유물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몇 년 전까지 처음 도굴한 사람이 생존해 있었고, 고려청자 10여점을 도굴했다는 말이 주변에 전하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한 최남식[2007년 작고]·김태순[2008년 작고] 두 분이 알고 있다는 풍문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굴꾼, 최초 공개자 모두에게 답을 구하기는 어려운 형국이다. 1972년 발굴 뒤 초창기에는 벽화의 주인공이 입었던 옷의 복식 형태 등이 통일신라 복식 형태와 유사하여 대체적으로 고려 초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이후 연구 자료들이 축적되면서 무덤형 태인 호석방형분의 비교 검토, 벽화 선녀들의 머리 스타일, 13세기 이후 활발했던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문화 교류로 나타나는 도교 회화적 성격 등으로 미루어 13세기부터 14세기 전반에 벽화 고분이 조성된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어지럽고 부조리한 속세에서 벗어나 자연을 배경으로 도연명이나 도잠 같은 인물들의 삶을 선망하며 유유자적하는 도교적 생활로 일생을 마친 지방 호족의 무덤으로 결론내리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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