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283
한자 迎勝里
영어공식명칭 Yeongseung-ri
이칭/별칭 영송(迎送)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홍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개설
성격 법정리
면적 7.67㎢
가구수 195세대
인구[남/여] 344명[남자 162명, 여자 182명]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영승리(迎勝里)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원영승리·계동리·장백리 등 3개의 행정리와 영승·계동·초동·장백 등 4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명칭 유래]

‘영승리’라는 명칭은 3개 마을 중에서 가장 큰 영승에서 비롯되었다. 삼국 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사신을 영접하고 환송하던 곳이어서 영송(迎送)이라 부르던 것을 1543년(중종 38)에 퇴계 이황(李滉)이 ‘영승(迎勝)’으로 고친 것에서 영승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퇴계 이황은 이곳에 살던 처외숙 전철(全轍)과 여기에 우거하던 장인 권질(權礩)의 회갑을 맞아 거창을 찾았다고 한다.

계동(溪東)·초동(草洞)은 거열산성 밑 계전(桂田) 골짜기 동쪽에 자리하므로, 또는 영천 냇물의 동쪽이라 하여 계동이라고 하고, 숲을 치고 마을을 열었으므로 섶풀 또는 신벌(薪伐)이라고 한다. 냇물을 가운데 두고 동쪽을 계동 또는 계전이라 하며, 서쪽을 초동 또는 어덕밑이라고 한다. 장백은 마을 앞을 흐르는 위천천 주변에 긴 모래밭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영승리는 본래 안의군 동리면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 때 신벌동과 병합하여 거창군 마리면으로 편입되었다.

영승 마을영승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이다. 장백 마을은 무신란 때 해주 오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자연환경]

영승리는 뒷편으로 취우령의 산줄기가 앞으로는 위천천이 마주 보는 곳에 있어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취락 조건을 갖추고 있다. 영승리의 동쪽은 북쪽의 취우령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거창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영승리의 서쪽은 위천면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위천천에 의해 월계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현황]

2016년 4월 30일 현재 면적은 7.67㎢이며, 총 195세대에 344명[남자 162명, 여자 18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벼농사를 짓고 있으며 일부 주민들은 시설 재배를 통해 딸기 등을 생산하고 있다.

주요 문화 유적으로는 조선 성종 때 사직을 지낸 사락정(四樂亭) 전철(全轍)이 강학하던 사락정, 퇴계 이황(李滉)·동춘당 송준길(宋浚吉)·사락정 전철을 제향하는 영승 서원이 있으며, 충효비로 정희돈 정려, 완산 이씨 정려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