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052
한자 驛院
이칭/별칭 성초역,생초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용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고려 시대 - 역원, 무촌역, 성기역
특기 사항 시기/일시 여말 선초 - 역원, 오양역 거제에서 가조현 서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거제로 이동
변천 시기/일시 조선 시대 - 역원, 성초역, 거창동원, 정태원, 고천원, 병화원, 성기원, 석적원, 고제원, 성초원, 무촌원, 반락지원, 장풍원
비정 지역 무촌역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 지도보기
비정 지역 성기역 -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지도보기
비정 지역 성초역 - 경상남도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 지도보기

[정의]

고려 시대~조선 시대 거창 지역에 설치한 교통, 숙박 시설.

[개설]

거창 지역에는 이미 고려 시대에 무촌역(茂村驛)과 성기역(星奇驛)이 설치되었고, 조선 초 성초역(省草驛)이 새로 설치되었다. 고려 후기 거제현과 함께 오양역(烏壤驛)이 함께 거창군 가조 지역에 이동했다가 조선 초 거제도로 돌아갔다.

조선 초 거창 지역에 설치되었던 원은 동원(東院), 정태원(鼎台院), 고천원(古川院), 병화원(竝火院), 성기원(星奇院), 석적원(石積院), 고제원(高梯院), 성초원(省草院), 무촌원(茂村院), 반락지원(半落只院), 장풍원(長風院) 등 모두 11곳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 시대의 역]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고려 시대 거창에는 무촌역과 성기역이 있었다. 모두 산남도(山南道)에서 관할하는 28개 역에 속했다. 두 역은 조선 시대 말까지 유지되었다. 무촌역은 현재의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무촌리에 있었으며 거창에서 함양, 산청, 진주로 이어지는 역이었다. 성기역은 현재의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에 있었으며 거창에서 우마현을 넘어 지례, 김천으로 이어지는 역이었다.

그 밖에 오양역도 있었다. 이 역은 거제현에 속한 역으로 고려 말 왜구의 침략이 심해지자 거제현이 거창의 가조 지역으로 옮겨오면서 오양역도 함께 이동하였다. 오양역은 가조현 서쪽에 설치되었다가 조선 초 거제현이 환도할 때 함께 이동했다.

[조선 시대의 역]

조선 초 거창에 새로운 역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무촌역, 성기역과 함께 성초역이 기록되어 있다. 성초역은 현재의 거창군 고제면 봉계리에 위치하여 거창에서 도마현을 넘어 무주로 가는 길에 있었던 역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안(利安)현에 설치된 안음신역(安陰新驛)이 기록되어 있다. 이안현은 현재 거창군 마리면으로 비정되므로 이 역도 조선 초 거창 지역에 신설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시대 거창의 주요한 역은 무촌역, 성기역, 성초역 등 세 곳이었다. 모두 경상우도 관할이었다. 거창은 무촌역을 통해 남쪽의 진주로, 성기역을 통해 경북의 김천으로, 성초역을 통해 전라도 무주 지역으로 연결되었다.

역에는 역리와 노비, 그리고 역마가 있었다. 18세기의 경우 무촌역에는 역리 59명, 남노(男奴) 51명, 여비(女婢) 17명이 있었고, 역마로는 대마(大馬)가 1필, 중마(中馬)가 2필, 하마(下馬)가 4필이었다. 성기역에는 역리 121명, 중마 1필, 하마 4필이 있었다. 성초역에는 역리 151명, 남노 53명, 여비 21명, 중마 2필, 하마 4필이 있었다[『거창부 여지승람』].

역이 위치를 보면, 무촌역은 거창 읍치의 남쪽 14리[5.5㎞], 성기역은 읍치의 북쪽 24리[9.4㎞], 성초역은 읍치의 북쪽 54리[21.2㎞]에 있었다[『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무촌역에서 성기역까지 45리[17.7㎞]이고 성초역까지 60리[23.6㎞]였다. 그리고 성기역에서 성초역까지는 30리[11.8㎞]였다. 인근 현에 속한 역과의 거리를 보면, 무촌역에서 함양 사근역까지 40리[15.7㎞], 안의 임수역까지 20리[7.9㎞], 합천 권빈역까지 40리[15.7㎞]였다. 성기역에서 안의 임수역까지 60리[23.6㎞], 합천 권빈역까지 70리[27.5㎞]였다. 그리고 성초역에서 지례 장곡역까지는 30리[11.8㎞]였다.[『경상도 읍지』]

[조선 시대 역로]

조선 시대 거창에서 한양으로 갈 때는 주로 상주를 경유하는 길을 택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거창은 전국 10로 중 서울에서 통영에 이르는 제5로에 위치해 있었다. 그중 상주에서 거창에 이르는 길은 상주~개령~김천~지례~거창~안의 노선으로 거창에서 상주까지는 230리였다. 반면 신경준의 『도로고』에 따르면 거창은 6대로 중 제4로인 서울~동래 길의 지선에 속했다. 또 다른 길은 거창~무풍~황간~영동~천안을 거쳐 한양에 이르는 길이었다. 거창에서 각 지역으로 가는 데 걸린 시간을 보면, 거창~한양 길은 735리로 8일이 걸렸고, 거창~대구 길은 182리로 이틀, 거창~진주 길은 160리로 하루 반, 거창~통영 길은 280리로 사흘이 걸렸다.

[조선 시대의 원]

한편 조선 시대 거창 지역에 있었던 원(院)은 모두 11곳이었다. 우선 거창현 지역에 9곳의 원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거창에는 동원, 정태원, 고천원, 병화원, 성기원, 석적원, 고제원, 성초원, 무촌원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고천원은 조선 후기에 없어졌다. 또한 당시에는 안음현에 속했으나 현재 거창군 마리면, 위천면 지역으로 비정되는 곳에 반락지원, 장풍원 등 2곳이 있었으므로 거창에 설치되었던 원은 모두 11곳이라고 볼 수 있다.

각 원은 역로 상에 위치하였다. 동원은 읍치에 있었으며, 읍치에서 남쪽 무촌역 방향으로 정태원[15리(5.9㎞)], 무촌원[20리(7.9㎞)], 고천원[34리(13.4㎞)]이 있다. 그리고 읍치 북쪽 성기역, 성초역 방향으로 병화원, 성기원, 석적원, 그리고 반락지원, 장풍원, 고제원, 성초원이 각각 있었다.

이처럼 조선 시대 거창은 덕유산, 가야산으로 둘러싸인 산악 지역이었으나 3개의 역과 11개의 원이 있었기 때문에 중앙 및 다른 지역과의 교통과 수송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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