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18
한자 朝鮮 時代
영어공식명칭 The Joseon Dynasty Period
이칭/별칭 이조 시대,조선 왕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정의]

1392년에서 1863년까지 조선 왕조가 존속했던 시기 거창군 지역의 역사.

[행정 구역 변천]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은 조선 시대 거창현(居昌縣) 지역과 안음현(安陰縣)[안의현(安義縣)]·삼가현(三嘉縣) 일부가 합쳐진 것이다. 거창현은 지금의 거창읍·고제면·웅양면·주상면·남상면·남하면·가조면·가북면 일대를 영역으로 하였다. 지금의 마리면·위천면·북상면안음현 영역이었으며, 신원면은 삼가현 영역이었는데, 1914년 거창군에 합쳐진 것이다.

거창현은 1414년(태종 14) 거제현(巨濟縣)과 합쳐져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거제현은 원래 남해안 도서에 있던 고을이었으나, 고려 후기 연안 도서 지역에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1271년(원종 2) 내륙의 가소현(加召縣)[가조현(加祚縣)]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당시 가소현은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의 속현(屬縣)이었다. 그러나 제창현은 1년 만인 1415년(태종 15) 거창현거제현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가조현은 계속 거창현으로 있다가 1422년(세종 4) 거제현이 본 고을로 돌아가게 되자 거창현의 속현으로 편입되었으며, 이후 거창현의 면리(面里)로 편제된다.

1495년(연산군 1)에는 거창현이 거창군(居昌郡)으로 승격되었다. 연산군의 왕비 신씨(愼氏)의 관향(貫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의 왕비였던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마저도 폐비가 되면서, 거창군은 거창현으로 강등되었다. 단경 왕후연산군 정비(正妃)와 고모·조카 사이였으며,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반정 세력에 살해당한 신수근(愼守勤)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1658년(효종 9)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거창현에서 일어나, 강상죄를 범했다 하여 거창현은 폐지되고 일시적으로 안음현과 통합되었지만, 2년 뒤인 1660년(현종 1) 장의신(章義信)의 상소로 고을이 복구되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하였는데, 경상도에서는 안음현정희량(鄭希亮)이 주동하였다. 난이 진압된 후 조선 정부는 역도의 고을이라는 이유로 안음현을 폐지하고, 둘로 쪼개어 거창현과 함양군(咸陽郡)에 분속시켜 버렸다. 아울러 거창현의 읍격(邑格)을 높여 거창도호부(居昌都護府)를 설치하였다.

1736년(영조 12) 안음현이 복구되었지만, 거창도호부의 읍격은 지속되었다. 그러다 1788년(정조 12) 거창도호부거창현으로 환원되었다. 거창도호부가 된 것은 폐지된 안음현의 절반이 합쳐져서인데, 1736년 안음현이 다시 설치되었음에도 도호부로서의 읍격을 유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1799년(정조 23)에는 거창현이 다시 거창도호부로 승격하였다. 단경 왕후의 관향이라는 이유였기 때문이다. 단경 왕후는 중종반정으로 폐비되었지만, 1739년(영조 15년) 복위되었다. 1799년 거창현거창도호부 승격은 단경 왕후 복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거창도호부로서의 읍격은 1895년(고종 32) 행정 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이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안음현은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 두 고을이 합쳐진 것이다. 1417년(태종 17) 고을 명칭이 안음현으로 바뀌었다. 고을의 읍치(邑治)가 처음에는 옛 감음현 지역에 있었는데, 이때 이안현으로 읍치를 옮겼기 때문이다. 1728년 무신란안음현정희량의 고향이었기 때문에 고을이 둘로 쪼개져, 거창현과 함양군에 분속되었다가, 1736년 이성택(李聖擇)이 상소를 올려 안음현이 복구되었다. 1767년(영조 43) 안음현은 ‘의(義)’로운 고을이 되라는 뜻에서, 고을 명칭을 안의현으로 바꾸었다. 안의현은 1895년 안의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읍치 지역은 함양군과 통합되고 지금의 마리면·위천면·북상면 지역이 거창군과 통합되었다.

삼가현은 원래 삼기현(三岐縣)과 가수현(嘉樹縣)이었는데, 1414년(태종 14) 삼가현으로 통합되었다. 삼가현도 1895년 삼가군이 되었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으로 고을의 대부분이 합천군에 통합되었고, 지금의 신원면 일대만 거창군에 통합되었다.

[행정과 군사]

조선 시대 지방 통치의 기본 골간은 중앙 정부가 일정하게 구획한 군현(郡縣)에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제(郡縣制)였다. 이때 지방관은 해당 고을의 행정·사법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까지도 행사하였다. 각 군현은 인구와 경제 수준, 군사적인 지리적 요건 등에 따라 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도호부(都護府)·군(郡)·현(縣)으로 읍격(邑格)이 나누어졌으며, 파견되는 지방관의 품계도 달랐다.

조선 시대 거창현·안의현·삼가현에는 모두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다만 거창현은 조선 후기에 읍격 변동이 잦아, 파견되는 지방관의 품계도 달라졌다. 먼저 1728년 무신란을 계기로 거창현거창도호부로 승격됨으로써 종3품의 도호부사(都護府使)가 파견되었지만, 1788년 거창현으로 환원됨에 따라 다시 현감이 두어졌다. 이어 중앙 정부는 거창현의 읍격은 유지하되, 지방관의 품계를 높여 1790년부터는 종5품의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1799년 거창현이 다시 거창도호부로 승격되면서, 1895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군수(郡守)가 파견되기 전까지 종3품의 도호부사가 거창도호부를 다스리게 되었다.

1485년(성종 16)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5호(戶)를 1통(統), 5통을 1리(里), 몇 개의 리를 면(面)으로 하고, 통에는 통주(統主), 리에는 이정(里正),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둔다고 규정되어 있다. 각 고을의 하부 구조를 면리제(面里制)와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구성하여, 효과적인 대민 지배와 원활한 조세 수취를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면리제가 각 고을의 하부 구조에 일률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읍치를 제외한 고을 외곽에는 속현을 비롯해 향(鄕)·소(所)·부곡(部曲)·촌(村) 등과 같은 임내(任內)가 별도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이들 임내에는 별도의 토착적인 향리 세력이 존재하여, 주읍(主邑)과는 이질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실제 면리제가 정착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 이후였다.

이에 면리제가 시행되었음에도 조선 전기까지 거창현·안음현·삼가현에는 여러 임내가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현재 명칭이 확인되는 임내로는 거창현의 속현인 가조현이 있다. 특히 가조현에는 1422년까지 거제현이 교우(僑寓)하였기에, 거제현의 임내였던 아주촌(鵝洲村)과 송변현(松邊縣)이 두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안음현에는 가을산소(加乙山所), 삼가현에는 면현소(緜峴所)·토촌소(吐村所)·유린서정(有麟西亭)이 있었는데, 안음현과 삼가현의 임내는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과 합천군에 각각 두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각 고을에 점진적으로 면리제가 정착해 갔다. 조선 전기 동안 임내 지역이 재지 사족에 의해 개발되고, 중앙의 통제력이 강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이에 속현·향·소·부곡·촌 등의 임내 중 규모가 큰 것은 몇 개의 면으로 분할되기도 하고, 작은 것은 하나의 면으로 통합되거나 리로 편제되기도 하였다. 또한 새로운 행정 구역의 경우, 전통적인 임내 명칭 대신, 동·서·남·북 방위명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거창도호부의 방명(坊名)[면 이름]으로는 동부면(東部面)·음석면(陰石面)·지상곡면(只尙谷面)·웅양면(熊陽面)·적화현면(赤火峴面)·고제면(高梯面)·주곡면(主谷面)·모곡면(毛谷面)·가을지면(加乙旨面)·천내면(川內面)·천외면(川外面)·청림면(靑林面)·고천면(古川面)·남흥면(南興面)·무등곡면(無等谷面)·고모현면(古毛峴面)·지차리면(只次里面)·하가남면(下加南面)·상가남면(上加南面)·가서면(加西面)·가북면(加北面)·가동면(加東面)이 있다.

안의현에는 현내면(縣內面)·황곡면(黃谷面)·초점면(草岾面)·대대면(大代面)·지대면(知代面)·남리면(南里面)·동리면(東里面)·고현면(古縣面)·북하면(北下面)·북상면(北上面)·서하면(西下面)·서상면(西上面)이 있었는데, 이 중 남리면·동리면·고현면·북하면·북상면이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된 면이다.

또한 삼가현에는 백동면(栢洞面)·상곡면(上谷面)·아곡면(阿谷面)·문송면(文松面)·가회면(佳會面)·대평면(大平面)·고현면(古縣面)·병목면(竝木面)·신지면(神旨面)·지옥면(知玉面)·모태면(毛台面)·계산면(界山面)·현내면(縣內面)이 있었는데, 이 중 신지면과 후에 제정되는 율원면(栗院面)이 1914년 거창군에 편입되었다.

조선 시대 지방 군제는 진관 체제(鎭管體制)가 기틀을 이루고 있다. 조선 전기 진관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거창·안음·삼가 세 고을은 경상 우병영(慶尙右兵營)[조선 전기 창원(昌原) 소재, 조선 후기 진주(晉州) 소재]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진주 진관(晉州鎭管)의 제진(諸鎭)으로 편제되었다. 또한 군사권을 가지고 있던 세 고을의 현감은 모두 무관 종6품 외직인 절제도위(節制都尉)를 겸직하였다.

진관 체제는 임진왜란 이전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개편되었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으면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이에 전란 도중 속오군(束伍軍)을 창설하였으며, 17세기에는 속오군 훈련을 위해 영장(營將)이 각 도(道)에 파견되었다. 영장 제도도 진관 체제를 근간으로 개편된 것이다. 경상도는 안동진(安東鎭)에 전영장(前營將), 상주진(尙州鎭)에 좌영장(左營將), 대구진(大邱鎭)에 중영장(中營將), 진주진(晋州鎭)에 우영장(右營將), 경주진(慶州鎭)에 후영장(後營將), 김해진(金海鎭)에 별중영장(別中營將)이 두어졌다. 이 중 거창·안음·삼가 세 고을은 우영장 관할이었다. 거창·안음·삼가 세 고을은 경상도 서남부에 위치해 있어, 전라도로 향하는 관문 역할을 하였으며, 반대로 전라도에서 경상도 중심으로 향할 때 거쳐야 하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조선 시대 동안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 역할을 했다.

[경제]

15세기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거창현의 호수(戶數)와 인구는 505호 1,640명, 안음현은 481호 793명, 삼가현은 307호, 2,027명으로 나타난다. 반면 18세기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거창도호부 호수와 인구를 4,263호 20,031명[남 8,892명, 여 11,139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안의현은 4,565호 19,311명[남 8,555명, 여 10,756명], 삼가현은 3,085호 17,131명[남 8,046명, 여 9,085명]으로 기록하고 있어, 인구가 큰 폭으로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세종실록지리지』의 인구 통계가 고려 후기 어지러웠던 국내외 정세, 조사상의 한계 등이 반영되었다 할지라도, 조선 후기까지의 인구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여기에는 조선 전기 이래 꾸준히 전개된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지 개간 등 경제 수준의 향상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거창현의 땅은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3,423결인데 논이 약간 적다고 하였다. 안음현은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춥고, 간전(墾田)이 1,793결인데, 역시 논이 약간 적다고 하였다. 삼가현은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913결이나 논은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았다. 한편, 『여지도서』에는 거창도호부의 전결이 한전(旱田) 2,089결, 수전(水田) 2,856결, 안의현의 전결이 한전 920결 92부 4속, 수전 1,576결 58부 5속, 삼가현의 전결이 한전 775결 18부 2속, 수전 1,345결 34부 7속으로 나타난다. 조선 전기에 비해 전결의 수가 증가하였으며, 논농사인 수전의 비중이 높아졌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전기 이후 지속된 향촌 개발과 새로운 농업 기술의 보급에서 비롯된 것이다. 거창 지역의 재지 사족들은 읍치(邑治)를 떠나 비교적 미개발 지역이었던 임내 지역을 개발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인력[소작농과 노비]을 동원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농업 기술인 이앙법(移秧法) 실시에 필요한 제언(堤堰)·보(洑) 등의 수리(水利) 시설을 확보해 나갔다. 이로 인해 농업 생산량이 증대하였으며, 상품 작물 재배를 견인하게 된다.

조선 전기 거창 지역의 토산물로는 벼·조·기장·감·대추·배와 은구어(銀口魚)가 있었고, 꿀·밀[황랍(黃蠟)]·호도(胡桃)·석이(石茸)·칠·종이·자리[석(席)]·여우 가죽·삵 가죽·노루 가죽을 정기적으로 진공(進貢)하였다. 또한 도기소(陶器所) 한 곳이 고천리(古川里)에 설치되었다. 조선 후기의 토산물로는 꿀·오미자(五味子)·감·밤·은구어·표고버섯·송이버섯·잣·사향·웅담·당귀·버섯이 있었으며, 진공되는 물품으로는 인삼·백봉령(白茯苓)·복신(茯神)·산약(山藥)·적작약(赤芍藥)·백작약(白芍藥)·한홍시(旱紅柹)·감국(甘菊)·구기자·감나무·하눌타리 씨·백청(白淸)·당귀·시호(柴胡)·적봉령(赤茯苓)·연교(連翹)·백술(白术)·곶감·시설(柹雪)·홍시·납육(臘肉)·꿩이 있었다.

조선 후기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상품 작물이 재배됨에 따라 지방 장시(場市)도 발생하게 된다. 이때 장시는 보통 5일장으로 운영되었다. 1832년경 편찬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에 수록된 조선 후기 거창 지역의 대표적인 장시로는 영천 장시(瀯川場市)[1·6일]·양무당 장시(養武堂場市)[3·8일]·가조 장시(加祚場市)[4·9일]가 있다. 조선 후기 안의현의 장시 중에는 고현장(古縣場)이 지금의 거창군에 소재하였었다.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거창현의 토성(土姓)으로는 유(劉)씨·정(丁)씨·장(章)씨·신(愼)씨·주(朱)씨, 속현인 가조현의 토성으로는 사(史)씨·조(曺)씨·갈(葛)씨·유(劉)씨·신(辛)씨가 확인된다. 이 중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토성으로는 신씨·유씨·장씨가 있다. 특히 거창 신씨는 이미 15세기 무렵 다수의 관인(官人)을 배출시켰고, 그 중 한 계열은 조선 전기 대표적인 훈척(勳戚) 가문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 외 안음현 토성으로는 이안현의 조(曺)씨·임(林)씨·김(金)씨·표(表)씨·하(河)씨, 감음현의 공(孔)씨·황(黃)씨·서문(西門)씨·서(徐)씨가 있으며, 삼가현의 토성으로는 삼기현의 박(朴)씨·염(廉)씨·오(吳)씨·조(曺)씨·공(公)씨, 가수현의 이(李)씨·노(魯)씨·박(朴)씨·삼(森)씨가 있다. 그러나 거창현과 달리 안음현·삼가현의 토성 중 사족으로 성장한 가문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이 지역에는 다른 고을 성씨가 다수 이주하여 사족 가문을 형성하였다.

한편, 거창의 가조현에는 1271년부터 1422년까지 경상도 남해에 위치한 거제현이 교우하였기에 거제의 토성들도 거창 지역을 매개로 사족화의 길을 걷게 된다. 고려 후기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도서 지역에 사람이 살기 어려워지자, 거제현의 토성 세력과 부속 역원(驛院)도 가조현 지역으로 옮겨졌던 것이다. 이때 사족으로 성장한 가문으로는 거제 반씨(巨濟潘氏)와 아주 신씨(鵝州申氏)가 있다. 아주현(鵝州縣)거제현의 속현으로 고려 후기 거제현의 토성 세력과 함께 가조현에 정착하였다.

14~15세기 토성 세력의 사족화와 재경 관인화(在京官人化)는 이들의 혼인 범위를 자연스레 확대시킴과 동시에 타 고을로의 이주를 촉진시켰다.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일반적이었던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과 자녀 균분 상속(子女均分相續)이라는 가족 제도와 상속 제도가 한 요인이었다. 반대로 타 고을의 유력한 사족이 거창에 정착해 있던 유력가의 사위로 들어가게 되고, 처가의 경제적 기반을 상속 받아 토착 세력으로 성장 할 수 있는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 결과 15세기 이후 다양한 성씨가 거창현에 정착하며, 유력한 재지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18세기 간행된 『여지도서』에 따르면 거창도호부의 주요 성씨로는 이(李)씨·윤(尹)씨·정(鄭)씨·김(金)씨·허(許)씨·형(邢)씨·표(表)씨·유(柳)씨·변(卞)씨·최(崔)씨·어(魚)씨·조(曺)씨·서(徐)씨·박(朴)씨·강(姜)씨·전(全)씨·문(文)씨·조(趙)씨가 있으며, 안의현에는 이(李)씨·박(朴)씨·유(柳)씨·반(潘)씨·임(林)씨·정(鄭)씨·변(邊)씨·신(愼)씨·조(曺)씨·권(權)씨·오(吳)씨·조(趙)씨·강(姜)씨·윤(尹)씨·경(慶)씨·곽(郭)씨·전(全)씨·우(禹)씨·김(金)씨·문(文)씨·신(申)씨·송(宋)씨·성(成)씨·홍(洪)씨·온(溫)씨가 확인된다. 이들 성씨는 거창 지역의 토성 세력 또는 먼저 정착한 타관(他貫)의 성씨와 혼인 관계를 맺거나, 복거(卜居) 및 낙향 등의 연유로 정착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집성촌(集姓村)을 형성하여 현재까지 가문의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교통과 통신]

조선 시대 지방에 설치된 역(驛)은 중앙 정부와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 조직으로 숙박 시설인 원(院)과 함께 설치된 곳도 있어서 역원(驛院)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역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참(站)·역참(驛站)으로 불리기도 했다. 역은 국가의 정령이 전달될 뿐만 아니라, 관리의 왕래·숙박·공물의 수송·사신의 영송(迎送) 등 국가의 여러 공적 행위가 이루어진 곳이다.

조선 시대 거창현의 역으로는 읍치 서북쪽 54리[21.21㎞]에 위치한 성초역(省草驛), 읍치 북쪽 24리[9.43㎞]에 위치한 성기역(星奇驛), 읍치 남쪽 15리[5.89㎞]에 위치한 무촌역(茂村驛)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거창현의 세 역은 경상도 함양군에 소재한 사근도(沙近道)가 관할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으나,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경상도 김산군에 소재한 김천도(金泉道) 관할로 나타나, 이후 변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院)은 각지의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믄 곳에 소재한 국가 숙박 시설이다. 관원의 편의를 위해 설치되었는데, 조선 시대 거창현의 원으로는 동원(東院)·정태원(鼎台院)·고천원(古川院)·병화원(竝火院)·성기원(星奇院)·석적원(石積院)·고제원(高梯院)·성초원(省草院)·무촌원(茂村院)이 있었다. 또한 안음현의 장풍원(長風院)과 삼가현의 율원(栗院)이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에 소재하였었다. 그러나 원은 조선 후기 점차 기능이 상실되어 갔으며, 민간에서 운영하는 주막(酒幕)·주점(酒店)과 역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이에 조선 후기로 접어들게 되면 지금의 거창군 일대에서 소재했던 원들도 모두 폐지된 것으로 나타난다.

역과 원은 교통수단으로도 활용되었지만, 연락을 취하는 관원들이 머무르는 곳이었고, 특히 역에서는 역마(驛馬)를 지급하며 통신을 보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군사적 변란과 같은 급박한 상황이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봉수(烽燧)가 중요한 통신 수단이 되었다. 봉수는 봉수대(烽燧臺)[봉화대(烽火臺)]에서 횃불[봉(烽)]과 연기[수(燧)]를 피워 상황을 알리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전국의 봉수는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한양 목멱산(木覓山)의 경봉수(京烽燧), 남쪽과 북쪽 국경에 위치한 연변 봉수(沿邊烽燧), 경봉수와 연변 봉수를 연결하는 내지 봉수(內地烽燧)로 구분된다. 또한 봉수는 직봉(直烽)[직선 봉수(直線烽燧)]과 간봉(間烽)[간선 봉수(間線烽燧)]으로 구분하였다. 직봉은 5개가 있었는데 모두 중심이 되는 간선(幹線)이었고, 간봉은 보조선에 해당되었다. 조선 시대 동안 전국에 673개소의 봉수대가 존재했다고 하며, 봉수대는 기본적으로 해당 고을의 지방관이 관장하였다.

조선 시대 거창 지역의 봉수로는 거창현에 소재했던 금귀산(金貴山)[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주상면 소재, 지금의 금귀봉] 봉수와 거말흘산(巨末訖山)[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소재, 지금의 거말산] 봉수가 있다. 이중 금귀산 봉수는 남쪽으로 합천군(陜川郡)의 소현(所峴) 봉수와 상응하고, 북쪽의 거말흘산 봉수와 상응한다. 또 거말흘산 봉수는 북쪽 지례현(知禮縣)의 귀산(龜山) 봉수와 상응하였다.

[학문]

조선 왕조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표방하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 국가였다. 성리학은 고려 후기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으며, 처음에는 철학적 사유 체계였으나, 고려 말 신진 사대부에 의해 정치 이념과 명분으로 표방되었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중요한 생활 규범으로 자리매김하였고, 조선 후기가 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양반 문화의 근간으로 정착하였다. 따라서 조선 시대 주요 학문은 단연 성리학이라 할 수 있으며, 관료들도 성리학을 기본 소양으로 삼았다. 거창 지역 학문과 사상의 흐름도 성리학의 보급과 전개 과정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성리학이 학문적으로 심화되는 것은 16세기 이후다. 그 이전에는 실천 윤리의 준수와 정치적 명분의 확립 등을 통해 학문적 밑바탕이 다져지던 시기였다. 이에 16세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새 왕조 개창과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거나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인사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으로 높게 평가를 받게 된다. 거창 지역에서는 고려 말 문신이었던 이원달(李元達)과 그의 사위 유환(劉懽)[1337~1409]이 고려 왕조가 멸망하자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창의 금원산으로 들어가 여생을 마쳤다. 훗날 거창 지역 사림들은 이 둘을 절의(節義)를 몸소 실천한 인물로 추숭하게 된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 대군(首陽大君)[세조]은 1455년(세조 1) 어린 조카 단종을 내치고 직접 왕위에 올랐다. 이에 사육신(死六臣)·생육신(生六臣)과 같은 절의 인사들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세조에 저항하다 화를 당하거나, 관직을 버린 채 은거하기도 했다. 이에 이지활(李智活)[1434~?]과 같은 인물은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거창의 박유산(朴儒山)에 은거한 채 단종을 위해 통곡했다고 한다.

15세기 후반 왕위에 오른 성종은 문치를 지양함과 동시에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세력인 사림파를 중용하였다. 사림파는 더욱 강화된 성리학적 명분론을 바탕으로 훈구파와 대립하였지만,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8년(연산군 4)의 무오사화(戊午士禍)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극심한 탄압을 당하게 된다. 이때 사림파와 관련된 인사, 연산군의 폭정에 염증을 느낀 인사들이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가거나, 다른 지방에 정착하였다. 당시 거창 지역에서는 사림파의 종장(宗匠)이자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한 김종직(金宗直)의 조카 김수양(金粹讓)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의 제자인 권시민(權時敏)[1464~1523]도 관직을 버리고 거창으로 내려왔으며, 김일동(金逸東)·이정희(李廷禧) 등과 같은 여러 인사들이 거창으로 돌아오거나 이곳에 정착하였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화를 당한 사림 중 가장 이름이 알려진 인사는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이다. 이 둘은 김종직의 대표적인 제자로 훗날 문묘(文廟)에 배향된다. 이 중 김굉필은 거창과 인접한 경상도 합천군 야로현(冶爐縣)에 거주하면서 정여창과 함께 거창 지역 인사들과 교유하였고, 강학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당시 김굉필·정여창의 강학 장소로는 수포대(水瀑臺)[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도리 소재]가 있다. 또한 인근에는 거창 출신으로 김굉필의 동서인 최숙량(崔淑梁)[1456~1515]이 거주하였는데, 최숙량은 이들의 강학 활동을 도우면서 지역의 성리학적 기틀을 다지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연산군이 물러가고 중종이 새로 즉위하였다. 중종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해 사림파 인사들을 중용하였고, 이들은 지치 주의(至治主義)에 입각한 왕도 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지방에 은거해 있는 인재들을 중용하기도 했다. 이에 1518년(중종 13) 사림파 인사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있던 김안국(金安國)은 경상도의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거창 지역에서는 변벽(卞璧)[1483~1528]·형사철(邢士哲)[1480~?]·형사보(邢士保)[1482~?]·유자방(柳子房)[1484~1540]이 추천을 받았다. 또한 1519년(중종 14)에는 변벽·형사보·유자방이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세기 중반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강조했던 사림파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림 계열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유(巨儒)가 배출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경상도에서는 예안(禮安)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진주(晉州)의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대표적인 인사다. 이들은 우리나라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켰으며, 그 학문적 정신과 업적은 제자들에 의해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로 전승되었다.

15세기 후반 이래 사림파의 핵심 인사와 접촉하며 형성된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16세기 중엽에는 많은 거창 지역의 인사들이 퇴계·남명과 교유하거나, 그들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이때 활동한 거창 지역의 대표적인 인사로는 임훈(林薰)[1500~1584]이 있다. 임훈퇴계·남명 등 당대의 명현과 교유하였는데, 퇴계가 있는 예안의 도산 서당(陶山書堂)에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기도 했으며, 조정에 관료로 있을 때는 퇴계의 중용을 건의하기도 했다. 같은 경상우도에 있던 남명과는 지역에서 만나며, 남명의 출처관(出處觀)에 공감을 표하였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거창 지역 성리학의 깊이는 더욱 심화될 수가 있었다.

한편, 퇴계남명이 직접 거창과 인근 지역을 찾기도 했다. 퇴계는 장인 권질(權礩)이 머무르고 있던 거창을 방문하였는데, 이때 장인이 있던 영송(迎送) 마을영승(迎勝) 마을로, 그리고 인근에 있던 수송대(愁送臺)수승대(搜勝臺)로 각각 개명하였으며, 이와 관련된 시를 지었다. 이로 인해 훗날 많은 저명인사들이 영승마을수승대를 찾아 퇴계의 정신을 기리기도 하였다.

남명은 진주와 합천 일대에서 활동하며, 많은 제자들을 배출시켰다. 남명은 관직 생활을 하지 않은 관계로 제자들의 활동지가 경상우도에 집중되어 있다. 거창도 남명의 제자가 대거 배출된 고을 중 하나였다. 특히 남명은 거창과 인접한 화림동(花林洞)[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일대]과 지곡사(智谷寺)[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면 내리에 소재했던 사찰]에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이때 거창에서도 많은 사림들이 화림동과 지곡사를 찾아 남명의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이 무렵 거창 지역 출신으로 남명의 제자가 된 인물로는 김신옥(金信玉)[1534~?]·정유명(鄭惟明)[1539~1596]·성팽년(成彭年)[1540~1594]·전팔고(全八顧)[1540~1612]·전팔급(全八及)[1542~1613]·문위(文緯)[1554~1631]·유중룡(柳仲龍)[1558~1635] 등이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우국충정의 뜻을 가진 많은 사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남명의 제자들이 대거 포진한 경상우도의 의병 활동이 활발하였다. 남명은 이기론(理氣論)에 입각한 성리학적 이론 심화보다는 경의(敬義)를 바탕으로 한 실천을 중요시 했던 성리학자였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지자 경상우도의 많은 사림들이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명의 제자였던 거창의 김신옥·정유명·성팽년·전팔고·전팔급·문위·유중룡 등도 임진왜란 때 경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의병을 일으키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 도대장(義兵都大將)을 맡은 김면(金沔)남명의 제자였는데, 이들의 의병진(義兵陣)이 거창에 설치되었다. 이 또한 남명의 경의 정신을 계승한 제자들이 거창에서 많이 배출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급변하였다. 특히 중국의 주인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어 갔고, 그 여파는 조선에까지 미쳤다. 조선이 명나라를 도와 청나라를 견제하자,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는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丁卯胡亂)과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게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남한산성에서 항거하였으나, 1637년 끝내 청나라에 굴복하고 군신(君臣)의 의(義)를 맺게 된다. 이는 많은 성리학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통적인 대의명분과 질서가 오랑캐라 멸시하던 청나라에 의해 무너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절개와 의리를 지키며, 자결을 하거나 고향에 은거해 버리는 관료와 성리학자들이 많았다. 이 무렵 거창 지역에서 절개를 지켰던 대표적인 인사로는 정온(鄭蘊)[1569~1641]이 있다. 정온정유명의 아들로 남명의 대표적인 제자인 정인홍(鄭仁弘)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온은 병자호란 때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고향 덕유산(德裕山)에 은거한 채 생을 마감하였다. 정온의 절개는 후대 당색(黨色)과 학파를 불문하고 많은 성리학자의 칭송을 받게 된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덕유산에 은거한 인사로는 훗날 문묘에 배향되는 송준길(宋浚吉)도 있었다. 송준길은 율곡학파(栗谷學派)의 학문적 적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로 덕유산에 머무는 동안 많은 필적(筆跡)을 남겼으며, 지역에서 여러 제자들을 양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선 후기 거창 지역에는 퇴계학파·남명학파로 대표되는 영남학파(嶺南學派) 계열과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기호학파(畿湖學派) 계열이 공존하였으며, 지금까지 이러한 성리학적 학풍과 전통이 전승되어 오고 있다.

한편, 거창 지역에는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한 향교(鄕校)·서원(書院)·사우(祠宇)·서당(書堂)·정사(精舍)·서숙(書塾) 등 많은 교육 시설이 있었다. 먼저 향교는 지방에 건립된 국립 교육 기관으로 ‘일읍 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각 고을마다 건립되었다. 향교의 구조는 교육 장소인 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 제의(祭儀) 장소인 대성전(大成殿)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대성전에는 공자(孔子)를 비롯한 중국의 명현들과 우리나라 ‘동국 18현’의 위패를 모셔놓았다. 이에 거창 지역에는 거창 향교(居昌鄕校)가 건립되어 지역의 교육과 교화를 주도해 나갔다.

향교가 조선 시대 관학(官學)을 대표했다면, 서원은 사학(私學)을 대표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서원도 향교와 마찬가지로 교육을 통해 후진을 양성함과 동시에, 제의를 통한 교화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향교처럼 국가에서 정한 인물이 아니라, 지역과 연고가 있는 인물을 배향한다는 차이가 있다. 거창 지역에서는 17세기 이후 서원과 사우가 많이 건립되었는데, 현재까지 존재가 확인되는 조선 시대 서원과 사우로는 역천 서원(嶧川書院)·도산 서원(道山書院)·완계 서원(浣溪書院)·용원 서원(龍源書院)·구연 서원(龜淵書院)·성천 서원(星川書院)·영빈 서원(瀯濱書院)·병암 서원(屛巖書院)·양천사(陽川祠)·용천사(龍泉祠)·포충사(褒忠祠)·경충사(景忠祠)·학림사(鶴林祠)·정충사(靖忠祠)·창충사(彰忠祠)·상충사(尙忠祠)·금계사(金溪祠)·덕천사(德川祠)·화천사(花川祠)·오례사(悟禮祠)·충의사(忠義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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