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도호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045
한자 居昌 都護府
영어공식명칭 Geochang Dohobu
이칭/별칭 거창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정 시기/일시 1728년연표보기 - 거창 도호부로 승격
개정 시기/일시 1788년연표보기 - 거창 도호부가 거창현으로 강등
개정 시기/일시 1799년연표보기 - 거창 도호부로 승격
개정 시기/일시 1895년 - 거창 도호부에서 거창군으로 변경
관할 지역 거창 도호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가북면·가조면·고제면·남상면·남하면·웅양면·주상면 일대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에 설치된 행정 구역.

[개설]

거창 도호부(居昌都護府)는 1728년(영조 4)과 1799년(정조 23) 두 차례에 걸쳐서 설치되었다. 1799년 이후 두어진 거창 도호부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관내에서 조선 전기 거창현에 속했던 거창읍·가북면·가조면·고제면·남상면·남하면·웅양면·주상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거창 도호부가 처음으로 설치된 것은 1728년으로, 그 해 발발한 이인좌(李麟佐)의 난(亂)이 계기가 되었다. 이인좌의 난은 1728년에 발생하여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하는데, 충청도에서는 이인좌가 거병하였으며, 경상도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이 거병하였으나, 곧 진압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이때 경상도에서는 거창현과 인접했던 안음현(安陰縣)에서 처음 난이 일어났었는데, 바로 정희량의 고향이었다. 이에 난이 진압된 직후인 1728년 4월,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법에 의거해 안음현을 폐지하고 거창현과 함양군(咸陽郡)에 나누어 소속시킬 것과 거창·함양 두 고을을 부(府)[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안음현이 역도(逆徒)의 고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영조는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조치하게 했고, 논의 끝에 거창 도호부가 두어졌다.

두 번째로 거창 도호부가 두어진 것은 1799년이다. 이때 국왕이었던 정조는 전교(傳敎)를 내려 거창이 단경 왕후(端敬王后)[1487~1557]의 관향(貫鄕)이기 때문에, 부(府)로 승격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로 인해 1799년부터 거창현이 다시 거창 도호부가 되었다. 단경 왕후는 11대 국왕 중종[재위 1506~1544]의 왕후였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신수근(愼守勤)연산군의 처남이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지 않은 관계로 반정군에 의해 살해당하였으며, 단경 왕후는 재위 7일 만에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비(廢妃)되고 말았다. 폐비였던 단경 왕후는 1739년(영조 15) 복위되었는데, 1799년 거창현거창 도호부 승격도 단경 왕후 복위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관련 기록]

『영조실록(英祖實錄)』 권17의 1728년(영조 4) 4월 24일 기사에는 이인좌의 난이 진압된 후, 거창 도호부를 두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수록해 놓았다. “영남 안무사 박사수가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임금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하였다. 박사수가 말하기를 ‘안음은 개혁하여 법대로 분속(分屬)시키고 함양·거창 두 고을은 모두 부사(府使)로 승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함양에 절진(節鎭)을 설치하여 거창 등 고을의 군대를 예속시켜 팔량로(八良路)를 방수(防守)하게 하면 뒷날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 권51의 1799년(정조 23) 6월 7일 기사에는 거창현거창 도호부로 승격시키라는 정조의 전교가 다음과 같이 수록되어 있다. “전교하였다. ‘왕후의 본향(本鄕)은 으레 모두 주(州)나 부(府)로 승격시켜 왔다. 거창현단경 왕후의 본향인데 연전에 고을의 무슨 폐단으로 인하여 부를 현으로 강등시켰다. 참으로 잘 살피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도로 부사로 승격시키더라도 비용을 절약하는 방도는 현감일 때의 예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라. 그리고 해당 수령 자리를 영구히 음직 벼슬자리로 삼아도 안 될 것이 없다.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널리 상고해서 이치를 논하여 적어 올리게 하라. 비답이 내려지거든 정관(政官)을 패초(牌招)하여 개정(開政)하고 계하(啓下)를 받아서 일의 체모를 높이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19세기 이후 간행된 읍지류(邑誌類)에 거창 도호부 설치 연혁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변천]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안음현은 폐지되고 반으로 쪼개져, 각각 거창현과 함양군에 분속되었다. 아울러 거창현과 함양군은 거창 도호부와 함양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그러다 1736년(영조 12) 안음현의 유생 이성택(李聖擇)의 상소로 안음현이 다시 설치되었으나, 도호부로서의 읍격(邑格)은 유지되었다.

그러다 1788년(정조 12) 거창 도호부는 다시 거창현이 되었다. 거창 도호부가 된 것은 폐지된 안음현의 절반이 합쳐져서인데, 1736년 안음현이 다시 설치되었음에도 도호부로서의 읍격을 유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는 이유였다. 실제 안음현이 다시 설치되고 거창 도호부의 크기가 예전 거창현 시절로 돌아갔음에도, 도호부가 감당해야 하는 역(役)이 계속 주어졌기에 적지 않은 폐단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1788년부터 예전과 같이 종6품의 현감(縣監)이 파견되었고, 1790년(정조 14)부터는 종5품의 현령(縣令)을 파견하였다. 이때 수령의 격이 높아진 것은 거창 고을에서 환곡(還穀) 폐단과 같은 민막(民瘼)[국민을 괴롭히고 나라를 망치는 정치 때문에 국민이 고생하는 일]이 연이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1799년 거창현이 다시 거창 도호부로 승격된 후에는 도호부로서의 읍격이 1895년(고종 32)까지 지속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기존의 8도 체제가 폐지되고 전국을 23부(府) 331군(郡) 체제로 개편하였는데, 이때 거창도호부가 거창군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거창 도호부의 존재는 전통 시대 지방 행정 구역 구획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가 된다. 한국사에 있어서 전통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은 호구(戶口)·전결(田結) 및 산천(山川)의 경계를 바탕으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해당 고을의 인적 연고나 이해관계에 따라 읍격이 승강하거나, 영역이 확대 및 축소되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거창현이 1728년과 1799년 두 차례에 걸쳐 거창 도호부로 승격된 것도, 호구·전결 상의 이유가 아니라 이인좌의 난과 단경 왕후의 관향이라는 인적 연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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