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루 바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027
영어공식명칭 Byeoru Bawi
이칭/별칭 베루 바위,피 발린 바위,마슬암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원은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7년 - 벼루 바위 『거창군사』에 수록
관련 지명 덕거 마을 -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지도보기
관련 지명 장풍숲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율리 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의 효자 반전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내린 효자 정문 바위에 대한 이야기.

[개설]

고려 우왕(禑王)[1365~1389] 때 거창 출신 반전(潘腆)은 늙은 아버지 봉양을 위해 고향인 위천으로 돌아왔으나 왜구의 침입으로 지새미 골짜기로 피난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무릎으로 가파른 바위 벼랑을 기어오른 반전의 흘린 피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붉게 남아 있어 주민들이 ‘피 발린 바위’, ‘베루 바위’ 또는 ‘마슬암’이라 한다. 반전의 아버지를 잡아가던 왜구도 반전의 효성에 감복하여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그 뒤, 나라에서 반전의 효성을 높이 사서 효 바위를 내리고, 그 바위에 ‘효자 반전 구거동문(孝子潘腆舊居洞門)’을 새겨 후세까지 기억하게 했다.

[내용]

금원산의 동쪽 기슭에 위치한 덕거(德巨) 마을로 흐르는 계곡의 북편에 비스듬히 놓여 있는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를 ‘벼루 바위’, ‘피 발린 바위’, ‘베루 바위’, ‘마슬암’이라 한다. 이 바위에는 고려 우왕위천면 강천리 역동에 살던 반전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반전은 중앙에서 산원(散員)[8품의 무관직]으로 있다가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고향인 위천으로 돌아와 있었다. 1388년(우왕 14) 왜구가 남쪽 해안 지방을 침입하여 노략질이 심하였는데, 거창까지 침략해 들어와서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물러갔다. 왜구들의 다시 쳐들어오자 과거 왜구의 횡포를 겪은 주민들은 서둘러 깊은 산속으로 피난을 했다. 반전은 늙고 병든 아버지가 있었기에 피난을 할까말까 망설이다가 왜구들의 포악성을 전해 듣고 아버지를 업고 지새미 골짜기로 숨어 들었는데, 가파른 바위 벼랑과 맞부딪히게 되었다. 온 길을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라 반전은 아버지를 등에 업고 산속 가파른 바위 벼랑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등에 업힌 병든 아버지에게만 신경 쓴 반전은 자기의 무릎이 벗겨져서 피가 흘렀어도 아픈 줄을 몰랐다고 한다. 이때 반전의 무릎에서 흘러내린 피가 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붉은 흔적으로 남아 반전의 효행을 말없이 전해 주고 있다. 거창 주민들은 반전이 기어오른 이 바위를 ‘벼루 바위’, ‘피 발린 바위’, ‘베루 바위’, ‘마슬암’'이라고 한다.

반전의 수난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를 안전지대에 겨우 모셔 놓았다고 생각한 반전은 틈이 나는 대로 부근 골짜기의 약초를 캐서 아버지에게 달여 먹이기도 하고, 근처의 나무 열매를 따서 식량으로 삼으며 그 즙을 짜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극진한 효성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움막 근처에서 약초를 찾고 있는데, 아버지가 있는 움막 쪽에서 소란스런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황급히 달려와 보니 왜구가 아버지를 잡아가고 있었다. 너무나 당황한 반전은 왜구에게 달려가서 제발 병든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애원했으나 왜구는 콧방귀만 뀔 뿐 반전의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순간 반전은 급할 때 쓰기 위해 숨겨 두었던 은덩이를 가지고 와서 왜구의 대장에게 사정을 하니, 왜구도 반전의 효성에 감복하여 두 사람을 그냥 돌려보냈다고 한다. 왜구가 물러간 뒤, 반전은 안전하게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으며, 나라에서는 반전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반전에게 효자 정문(孝子旌門)을 내렸다. 지금 마리면 장풍숲 앞인 모동으로 가는 길과 장기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도로 앞에 도로 확장 공사로 구멍만 남은 곳에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를 ‘반전암’이라 했고, 그 바위에 ‘효자 반전 구거동문(孝子潘賟舊居洞門)’이라는 여덟 자가 새겨져 있어서 반전의 효성을 후세에까지 기리었다고 한다.

[모티프 분석]

반전의 갸륵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덕거 마을에 세워진 효행 정문은 효행담 모티프를 제시하고 있다. 효행을 칭찬하는 포상으로 나라에서 내려진 정문은 여러 사람에게 그 행적을 알리려는 교화적 성격도 지니고 있다. 산업화의 도래와 함께 효를 포함한 유교 문화의 폭과 깊이는 차츰 축소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전통 사회의 정신문화와 문화유산의 중요한 가치를 반전의 효자비를 통해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