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부리의 유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017
한자 節婦里-由來
영어공식명칭 Jeolburiui yurae
이칭/별칭 절부지리의 유래,절부 탐진 최씨 정려 유래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조현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78년 7월 26일 - 「절부리의 유래」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7년 - 「절부리의 유래」, 『거창군사』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3년 - 「절부리의 유래」, 『거창 전설』에 수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2013년 - 「절부리의 유래」, 『서부 경남의 전설』에 수록
관련 지명 절부리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 지도보기
채록지 「절부리의 유래」 채록지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지명 전설
주요 등장 인물 절부 탐진 최씨
모티프 유형 열부 모티프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 절부리의 마을 지명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 절부리는 절부 탐진 최씨와 관련하여 그 유래가 전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380년(고려 우왕 6) 왜구가 낭장(郎將) 김순의 아내인 최씨를 욕보이려 하자 최씨가 자결을 했는데, 그런 이유로 이 마을을 ‘절부의 마을[절부지리]’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채록되어 「절부리의 유래」로 전한다.

[채록/수집 상황]

1978년 7월 26일 박종섭이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송정리에서 신길재[남, 58세]에게서 채록했다. 거창군사 편찬 위원회의 『거창군사』(거창군, 1997)와 2013년 사단 법인 향토 민속 보존 협의회에서 발행한 『거창 전설』, 대구 문창사에서 발행한 『서부 경남의 전설』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절부리는 1380년부터 불린 이름이다. 절부리의 동쪽 어귀에 ‘절부 최씨각’이라는 비각에 얽힌 이야기 때문이다. 고려 말기에 왜구가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이 마을에 낭장 김순이 있었는데, 아내 탐진 최씨와는 결혼한 지 다섯 달밖에 되지 않았다. 1380년에 왜구가 다시 침입하여 김순은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아내를 두고 왜구를 무찌르러 나갔다. 그런데 왜구가 이 마을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왜구들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했다. 김순의 아내 탐진 최씨에게도 닥쳤다. 왜구가 최씨를 겁탈하기 위해 다가와 최씨의 젖가슴을 만지자, 최씨는 은장도를 꺼내어 왜구의 더러운 손이 닿은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고 자결해 버리고 말았다. 그후 조정에서 탐진 최씨의 높은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최씨가 빨래하러 나갔던 빨래터의 빨랫돌을 옮겨 거기에 비문을 새기고, 정려각을 지은 뒤 이 마을의 이름을 ‘절부리’라고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왜구에 의해 정려각이 불타면서 절부에 관한 기록이 훼손되었는데, 조선 후기 영조 때 복원을 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다시 정려각이 철거당하고 마을 이름도 덕곡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은 다시 절부리로 불리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정려각을 1963년 중건하면서 면사무소의 직원 김영선이 ‘절부 최씨 정려 중건기’를 지었는데, 여기에도 관련된 이야기가 적혀 있다.

[모티프 분석]

「절부리의 유래」는 절개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한 열녀가 주요한 모티프이다. 탐진 최씨는 왜구가 신체의 일부를 만지자 은장도로 그 부분을 도려내 버리고 자결을 했다. 나라에서는 그것을 기리기 위해 정려각을 새우고 마을의 이름을 ‘절부리’로 했다고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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