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 처 탐진최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953
한자 金洵 妻 耽津崔氏
영어공식명칭 choissi
이칭/별칭 탐진최씨(耽津崔氏)
분야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박태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380년연표보기 - 열녀 최씨 사망
사당|배향지 절부 숙부인 탐진최씨 지비(節婦淑夫人耽津崔氏之碑)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절부리 지도보기
성격 열녀
성별
본관 탐진(耽津)

[정의]

고려 후기 거창 지역의 열부.

[개설]

탐진최씨(耽津崔氏)[?~1380]는 공민왕 때 왜구의 노략으로 곤욕을 치를 때 붙잡혀 욕을 보게 되었으나 굳게 항거하여 순절한 열부이다. 나라에서는 절부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절부리라 하였다.

[가계]

탐진최씨는 낭장(郎將) 김순(金洵)의 아내이다. 탐진(耽津)은 전남 강진 일대의 옛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동음현이 경덕왕 때 탐진현으로 바뀌었고 조선 시대인 1417년에 도강현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다. 탐진최씨는 최사전(崔思全)을 시조로 한다. 원조는 고려 때 상약원 직장(尙藥院直長)을 지낸 최철(崔哲)이다. 최사전은 고려 때 장작감(將作監)을 역임한 최정(崔靖)의 아들이며, 의술로 조정에 진출하여 인종이자겸(李資謙)을 제거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에 녹훈되었다. 최사전의 아들 최변(崔弁)과 최열(崔烈) 이후의 기록이 전란으로 사라져 각 파 중시조들의 세거지를 따서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절부 최씨가 고려 말 인물이므로 그 이후에 거창으로 이주한 후손일 것이다.

[활동 사항]

1380년(우왕 6) 7월 남해안을 침공한 왜구가 마을에 쳐들어와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이때 탐진최씨혼례를 갓 치르고 남편 김순을 중랑장으로 싸음터에 보낸 뒤 시부모와 집을 지키고 있다가 왜구에게 잡혀 겁탈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탐진최씨는 우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몸이 더러우니 씻고 오겠다고 왜구를 달래 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왜구가 부엌에 들어가 보니 최씨는 왜구가 주물렀던 두 가슴을 식도로 잘라 두 사발에 하나씩 담아 놓고 죽어 있었다. 난리가 끝난 뒤 이 소문을 들은 조정에서는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열녀의 마을이라 하여 이 마을에 ‘절부리’라는 이름을 내렸다. 이후 절부리 탐진최씨 문중에서 정려를 중건하고, 문소 김영선이 「절부 숙부인 탐진최씨지비(節婦淑夫人耽津崔氏之碑)」라는 기문(記文)을 썼다. 마을 입구에 정면 한 칸 특면 한 칸의 맞배 기와지붕으로 ‘절부 탐진최씨 정려(節婦耽津崔氏旌閭)’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탐진최씨의 행적을 기려 나라에서 ‘절부리’라는 마을 이름을 내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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