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719
한자 月星 義擧 事蹟碑
영어공식명칭 Memorial Stone of Wolseong Uibyeong
이칭/별칭 거창 월성 의거 사적비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유성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71년연표보기 - 거창 월성 의거 사적비 세움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9년 5월 25일연표보기 -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
현 소재지 월성 의거 사적비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월성숲지도보기
원소재지 월성 의거 사적비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월성숲
성격 비|사적비
관련 인물 오일선(吳馹善)|김성진(金成鎭)|김현수(金顯壽)|하거명(河巨明)|박화기(朴華箕) 등 40여명의 월성 의병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 너비, 두께) 203㎝[높이]|76㎝[너비]
관리자 월성 의거 사적비 건립 위원회
문화재 지정 번호 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 시설

[정의]

1906년 을사늑약(乙巳勒約) 체결에 반대하여 오일선(吳馹善), 김성진(金成鎭) 등이 거창 북상면 월성 서당에서 모여 일제에 투쟁을 목표로 무장 항거한 의병 운동을 기념하고, 월성 의병 48위를 기려 애국정신을 고취하고자 세운 사적비.

[개설]

월성 의병은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1906년에 남덕유 월성에서 봉기하여 일어났다. 40여 명이 항일 의거를 결의하고 산중에서 활동하였으며, 덕유산 의병 200여 명에게 자금과 군수 물자도 조달했다. 1908년 7월11일자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 ‘폭도에 관한 편책’에도 덕유산에 약 40명의 의병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건립 경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오일선, 김성진, 김현수(金顯壽), 하거명(河巨明), 박화기(朴華箕) 등 48명이 거창 북상 월성 서당에 모여 결의를 다짐하고 부대 이름을 ‘월성 의병’이라 칭한 후 의병 봉기하여 적에게 많은 손상을 주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전사 또는 체포되어 투옥되는 등 박해를 당하였다. 이 의병 운동을 기려서 1969년 사적비 건립 위원회를 만들고 1971년 거창 북상면 의병들의 활동 근거지였던 월성숲월성 의거 사적비를 세웠다. 문학 박사 이희승이 비문을 짓고, 대한 광복회장 이갑성이 글을 썼다.

[위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양지 마을월성숲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

비석 받침대 귀부(龜趺) 위에 비신(碑身) 을 세우고, 머릿돌 이수(螭首)를 올린 화강암 석재 사적비이다.

[금석문]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무렵 월성리에서 남강 오일선 선생을 중심으로 의사 40여 명이 월성 서당에 모여 도총, 유격, 후군, 군수, 정보 등의 부서를 편성, ‘월성 의병’이라 했다. 군사본부를 김현일의 사랑채에 두고 작전 지휘를 했다.1906년 문태서 의진과 제휴, 고창골에서 싸웠고 덕유산 의병 2백여 명에게 군수 물자를 공급 하기도 했다. 1907년 거창읍 주둔 적을 습격, 임구희가 전사했다. 1908년 무주 구천동 전투에서 전과를 거두었으나 하거명, 김권원이 전사하는 등 피해가 컸다.- 중간 생략 - 그 의로운 정기는 영원히 빛날 것이요, 후생들의 마음속에 조국 수호와 번영의 길을 밝혀주는 횃불이 될 것이다"

[현황]

해마다 3월 1일 삼일절 기념일에 월성 의병 추모회, 거창군 관계자, 면민들이 월성 의거 사적비에 모여 월성 의병 48인을 추모하고 월성 의병의 항일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의의와 평가]

거창은 일제 강점기 탄압 기구인 경찰서를 세울 만큼 일제에 대한 항거가 거세게 일어났던 곳이었다. 그중에서 월성 의병은 무력 항쟁으로 문태수가 이끌던 호서 의병과 연합하기도 하고 덕유산 의병에 군수 물자를 제공하는 등 다양하게 항쟁하여, 경무국 『폭도에 관한 편책』에 기록될 정도로 큰 타격을 준 의병 활동이다. 월성 의병의 항일 투쟁 정신은 1919년 3·1 만세 운동, 거창에서 일어난 파리 장서 운동 등 일제 강점기 항거의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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