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인 집단 청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41
한자 居昌人 集團 請願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신용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731년 - 거창 지역 대홍수 발생
발생|시작 시기/일시 1732년 초 - 거창인 집단 청원, 집단 상경
전개 시기/일시 1732년 전반기 - 거창인 집단 청원, 상경 청원
종결 시기/일시 1732년 4월 - 거창인 집단 청원, 영의정에게 호소, 영조에게 보고
발생|시작 장소 거창
종결 장소 한양

[정의]

1732년(영조 8) 거창 지역민들이 집단 상경하여 홍수에 대한 진휼을 청원했던 사건.

[역사적 배경]

1731년(영조 7) 거창 지역에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큰 홍수가 났다. 그러나 중앙 정부는 평년과 같이 무거운 세금을 매겼으므로 지역민들의 생활이 ‘참혹할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거창 도호부에 할당된 세금은 과중하였다. 거창 사람들이 매년 부담해야 할 세금을 보면, 전세 무명 70동, 대동세 무명 70동과 쌀 480여 석, 균역세 금전 1,700 냥과 베 4동, 환곡세 5,700여 석이었고, 여기에 군역과 군포, 각종 잡세가 추가되었다.

[경과]

수재로 어려움을 겪던 거창 지역민들은 1732년(영조 8) 초 중앙 정부에 세금 감면을 요청하고자 유생과 농민들이 함께 상경하였다. 이들은 한양의 여관에 묵으면서 정부 각처에 청원을 올렸다. 예조에서는 거창의 수재를 경연에 올리려고 했으나 영조는 이를 보류시켰다. 또한 경차관을 만나 거창의 사정을 호소하여 조세 감면을 받으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실제 그들은 한양에서 ‘굶어 죽을 처지’가 되었다.

청원인들은 마지막 수단으로 그해 4월 초 입궐하는 영의정 홍치중의 길을 가로막고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였다. 홍치중이 사정을 알아보니 이미 경연에서 막힌지라, 홍치중이 직접 영조에게 거창 사람들의 처지를 아뢰고 2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영조는 거창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1728년에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정희량의 반란 때문이었다. 그해 이인좌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정희량은 이 거사의 영남 책임자로 현재 거창군 위천면에서 거병하여 거창, 안음, 함양, 합천을 점령했다가 관군에 진압된 적이 있었다. 이 반란은 임진왜란 이후 최대의 반역 사건으로 영조는 이에 대해 큰 위협을 느꼈고, 말년까지 이 지역에 대한 지속적인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

영조박동추를 거창 부사로 임명한 것도 거창 지역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박동추이인좌의 난 때 계원장(繼援將)으로 한양과 개성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했던 인물이었다. 영조박동추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서 1729년 사간원 정언 심명열이 “거창 부사 박동추가 백성을 침해 학대하여 죄 없는 자를 함부로 죽였으므로 잡아다가 사실을 밝혀야 한다.”라고 탄핵하자,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묵살할 정도였다.

전후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거창 부사의 학정은 사실로 생각된다. 당시는 정희량 반란 사건 이후 계속해서 반란 사건 연루자를 색출, 조사, 처벌하는 중이었기 때문에 거창 부사가 거창 지역의 수재에 대해서 제대로 진휼하지 않았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과]

청원에 대한 중앙 정부의 처리 결과는 사료에 나타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전후의 사정으로 미루어 보아 거창인의 청원은 수용되지 않은 듯하다.

[의의와 평가]

거창인 상경 청원 사건은 정희량의 반란 이후 ‘반역향’으로 낙인찍혀 정치적, 경제적으로 고통을 당했던 지역민의 사정과 함께 자연재해에 대해 양반과 농민이 함께 해결에 나섰던 지역민의 활동력을 동시에 보여 준다. 이 사건은 사료에서 확인되는 거창인 최초의 상경 투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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