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현의 치소 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31
한자 巨濟縣- 治所 移動
영어공식명칭 Movement of Geojehyeon Ruling Plac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상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271년(원종 12)~1414년(태종 14) - 거제현의 치소 이동이 삼별초의 활동과 왜구의 침입으로 일어나고 거제현과 거창현이 통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 됨
종결 시기/일시 1422년(세종 4)연표보기 - 거제현의 치소 이동이 종결되어 거제현이 거제도로 다시 이전

[정의]

고려 후기부터 조선 초 사이 거제현의 치소가 거창 지역의 가조현으로 이동된 사건.

[개설]

고려 시대 거제 지역은 주읍인 거제현과 아주(鵝洲)·송변(松邊)·명진(溟珍) 등 3곳의 속현과 다수의 부곡제(部曲制) 지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고려 후기 삼별초(三別抄) 항쟁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인해 거제현은 거창군의 속현인 가조현(加祚縣)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는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직면한 고려 정부가 고육지책으로 시행한 해방(海防) 정책의 일환이었다. 거제현은 1422년(세종 4) 복구되었으며, 그에 부속한 영현들은 복구 과정에서 이전의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고 직촌화(直村化) 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배경]

1270년(원종 11) 6월 고려 정부는 몽골과의 강화(講和)로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이에 반기를 든 장군 배중손(裵仲孫)과 지유 노영희(盧永熙) 등이 주축인 삼별초 세력은 승화후(承化侯) 온(溫)을 왕으로 추대하고 반몽(反蒙)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8월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성(龍藏城) 일대를 수도로 삼고, 경상도 남해도(南海島)를 지역 거점으로 삼아 연해안과 내륙 지역을 공략하여 오늘날 거제·창원·부산 지역을 장악하였다. 한편, 고종 초에 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왜구들은 충정왕~공민왕 대 집중적으로 출몰하여 남해 연안과 도서 지역 주민들의 생업을 어렵게 하였다. 이에 고려 정부는 도서 지역의 치소(治所)를 내륙으로 옮기고 주민들을 이주케 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제현거창현의 가조현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충렬왕 대에는 관성(管城)에 합병되기도 하였다.

[경과]

1271년(원종 12)부터 시작된 삼별초 세력의 거제도 공략과 뒤이은 왜구의 창궐은 거제 지역 사회의 변동을 초래하였고, 마침내 거제현거창현의 가조현에 들어와 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그 기간이 장기화되면서 거제현은 가조현을 아울렀을 뿐 아니라, 아주·송변 등 속현 지역과 오양역(烏壤驛)을 관할하면서 주민과 치소, 그리고 영역을 모두 갖춘 공식의 주현(主縣)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거제현의 치소는 가조에, 아주현거창현의 동쪽 10리 거리에, 송변현은 남상 무촌역 남쪽 14리 지점에, 오양역은 가조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들 지역은 오늘날 거창군 가조면가북면의 일부, 남하면남상면의 일부 지역에 걸쳐 있다.

[결과]

오늘날 거창 지역으로 이주한 거제현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1414년(태종 14) 거창현과 통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분할하여 거창현거제현으로 되었다. 1422년(세종 4) 거제현이 원래의 섬으로 복귀하게 되면서 거창 지역은 가조현이 복구되지 못하였고 거창현만 남게 되었다. 한편, 그 과정에서 아주·송변 등 속현과 다수의 부곡제 지역은 과거의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고 대부분 직촌화의 길을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에서는 거제현이 거창 지역에 머물게 된 사실을 ‘타관에서 머물다’는 뜻으로 ‘교우(僑寓)’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다방면에 걸친 거창 지역의 변화가 함의되어 있다고 보인다. 거제현의 치소를 거창 지역으로 옮긴 것은, 거창이 전란기 안전처(安全處)인 동시에 많은 인구가 유입되어도 민인들이 생계를 마련할 수 있을 만큼의 수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거창현의 영현이었던 가조현이 거제현에 편입된 것은 향촌 사회(鄕村社會) 주도층의 변화와 더불어 거창현의 현세(縣勢)에도 일정한 영향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가조 분지 일대는 많은 인구가 한꺼번에 외부로부터 유입된 만큼 개발이 활성화되고 생업의 형태도 갈래를 수반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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