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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창현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044
한자 濟昌縣
영어공식명칭 Jechan-hyeon
이칭/별칭 제창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이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1414년연표보기 - 제창현 제정
폐지 시기/일시 1415년연표보기 - 제창현 폐지
관할 지역 제창현 -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가북면·가조면·고제면·남상면·남하면·웅양면·주상면 일대

[정의]

1414~1415년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일대에 설치된 행정 구역.

[개설]

고려 후기 왜구들의 침입이 극심해지면서, 해안이나 도서에 위치한 고을 중에는 없어지거나 육지로 읍치(邑治)를 옮기는 경우가 있었다. 경상도 거제현(巨濟縣)도 왜구의 침입으로 땅을 비우고 내륙의 속현(屬縣)이었던 가조현(加祚縣)으로 옮겨졌다. 그런 가운데 조선 전기 지방 행정 구역 개편 과정에서 거창현과 가조현으로 옮겨진 거제현이 합쳐져, 일시적으로 제창현(濟昌縣)이라는 고을을 두게 되었다. 제창현은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관내에서 조선 후기 거창 도호부(居昌都護府)에 속했던 거창읍·가북면·가조면·고제면·남상면·남하면·웅양면·주상면 일대를 관할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남해안 일대에 사람들이 살기 힘들어지자, 고을 전체가 내륙으로 옮겨가는 경우가 발생하였다. 도서로 이루어진 거제현도 그 중 하나였다. 이에 1271년(원종 12) 거제현이 내륙에 위치한 합주(陜州)의 속현이었던 가소현(加召縣)[가조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거제현 사람들이 거제도를 떠나 가소현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 진행된 지방 행정 구역 개편, 그리고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내륙으로 옮겼던 제창현도 개편 대상이 되었다. 이에 1414년(태종 4) 전국적으로 작은 고을이 통폐합되는 분위기 속에 거창현이 가조현으로 옮겨진 거제현과 통합되어 제창현이 탄생하였다.

[관련 기록]

제창현의 이력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晉州牧) 거창현 조(條)와 거제현 조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세종실록지리지』 거창현 조에는 “본조(本朝)[조선] 태종(太宗) 갑오년(1414) 거제와 합하여 제창현으로 일컫다가 을미년[1415] 다시 나누어 거창(居昌) 현감(縣監)을 두었다. 별호는 아림(娥林)이다. 속현이 하나인데 가조현이다. 이는 원래 가소현인데 신라 때 감음(減陰)으로 이름을 고쳐서 거창군(居昌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 때 예전 이름으로 다시 고쳐 현종(顯宗) 무오년(1018)에 합주(陜州)[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일대]의 임내(任內)로 붙였다가, 뒤에 옮겨서 거창으로 붙였는데[소(召)가 변하여 조(祚)가 된 것은, 방언으로 서로 가깝기 때문] 원종(元宗) 신미년(1271)에 거제로 이속시켰다가 본조(本朝) 금상(今上) 4년 임인(1422)에 도로 거창에 붙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거제현 조에는 “원종 12년 신미(1271)[원나라 지원(至元) 8년] 왜적(倭賊)으로 인하여 땅을 잃고 거창 가조현에 교거(僑居)하였다. 본조 태종 갑오년(1414)에 거창에 합하여 이름을 제창현으로 하였다가, 을미년(1415)에 다시 쪼개어 거창현을 만들고, 금상 4년 임인(1422)에 다시 옛 섬으로 돌아가게 하여, 4품 이상의 지현사(知縣事)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1414년 제창현이 성립되었으나, 존속 기간은 1년에 불과했다. 1415년(태종 15) 제창현거창현과 가조현으로 옮겨진 거제현으로 다시 분리된 것이다. 이어 왜구의 침입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고 해안이 안정화되면서 가조현으로 옮겨졌던 거제현이 본래의 거제도로 돌아가고, 거제현이 떠난 가조현은 거창현의 속현이 되었다. 한편, 거창현거제현이 다시 분리된 후에도 ‘제창(濟昌)’이라는 이름은 거창 고을의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창현의 존재는 전통 시대 지방 행정 구역 구획의 특징을 살펴 볼 수 있는 사례가 된다. 한국사에 있어서 전통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은 중앙의 합리적인 통제력보다는 지방 세력의 이해관계와 인적 연고가 우선시 되었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으로 원래의 거제현이 탕패(蕩敗)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까지 거제현이 존재했고 거창현과 합쳐져 제창현이 성립된 것도, 거제현의 향리와 주요 백성들이 속현인 가조현으로 옮겨져, 인적 기반을 고스란히 유지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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