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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080
한자 獨立運動
영어공식명칭 Independence Movement of Geochang
이칭/별칭 거창 독립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심옥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1910년 이전 - 독립운동이 거창 지역 국권 회복 운동으로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0년 - 독립운동이 거창 3·1 만세 운동과 파리 장서 운동으로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1930년 - 독립운동이 거창 근대 교육 확산으로 전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1945년 - 독립운동이 농민 운동, 청년 운동 등 다방면에서 전개

[정의]

1895년부터 1945년까지 국권 회복을 위해 거창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으로 의병 운동, 3·1 만세 운동, 파리 장서 운동, 민중 운동 등 민족운동.

[의병 운동 전개와 거창 의병의 항전: 1910년 이전]

을미사변 이후 전국에는 항일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1896년 1월 8일 진주성 점령에 참여했던 거창 출신의 노응규 부대의 참전으로 시작된 경상도와 전라도, 덕유산 일대에서는 일본 군대에 저항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거창 지역 의병장을 중심으로 병사가 최하 10명 내외부터 100명~150명 내외에 이르는 의병 부대가 일제의 토벌 공세에 맞섰다.

초기 거창 의병 운동은 유림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중·후기로 접어들면서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과 거창 민중이 합세하면서 민중 운동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대표적 항전지로서 거창 월성 의병은 호서 의병과 제휴하는 것은 물론 전라남북도, 충청남북도 등지에서 지역 의병장과 지역 주민들이 합류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거창을 중심으로 합천, 안의, 가북 등지 등에서 활약한 의병장으로는 문태수, 전성범, 박춘실, 유종환, 김천만, 오 진사, 차은포 의병장 등이 있다. 험준한 산악 지대의 특성을 내세워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 거침없이 맞섰던 거창 의병의 항전은 지역 독립운동의 정신적 뿌리를 일구었다.

[거창 3·1 만세 운동과 파리 장서 운동의 전개: 1910년~1920년대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비분한 거창 지식인 2명[이주환, 윤봉의]이 자결하자 지역 향촌 사회는 충격을 받았다. 이후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 공원에서 시작된 3·1 만세 운동으로 전국 각지에 독립 선언서가 배포되었다. 거창 지역도 3월 20일 가조면 장터 만세 운동에 이어 22일 거창읍 장날 만세 운동, 4월 8일 위천면 장날 등지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특히 가조면가북면을 중심으로 거창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는 오문현, 어명철, 김호, 최영순, 이병홍, 김채환 등이 대표적이다. 거창 3·1 만세 운동은 유림 계층은 물론 지역민의 참여로 확산된 민중적 항일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다.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 과정에서 유교계는 주체적 입장에서 세력을 규합, 주도적으로 ‘파리 장서 운동’을 전개했다. 이를 통해서 한국 유림 대표 137명이 파리 평화 회의에 연서로 한국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 장서를 보냈는데, 영남본 장서 발송본에 수록된 거창 인물로는 곽종석, 김재명, 윤인하, 이승래, 변양석, 박종권, 윤철수 등이 있다. 파리 장서 운동은 유교계가 근대적인 독립운동을 지향한 시도로 평가되고 있다.

[기독교 유입과 거창 근대 교육의 확산: 1920년~1930년대]

3·1 운동 이후 두드러진 것은 대중 단체의 급속한 증가였다. 그중에서도 교육, 애국, 계몽 목적의 청년 단체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한 근대 교육 기관이 급속하게 확산하였다. 해방 이전 거창 지역에 조직된 기독 청년회, 거창 청년회, 거창 청년 동맹, 거창 청년단은 지역 근대 교육 확산과 무관하지 않다. 거창 지역의 첫 교회는 호주 장로교 선교부에 있었던 스미스 목사가 설립한 개명리 교회[1904년 가을 설립]이다. 교회에서는 명덕 여자 강습소, 유치원, 보육원 등을 갖추어 교육 활동을 주도했지만 신사 참배 반대로 폐교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거창의 근대 학교로는 거창 소학교[1907년 설립], 명덕 여자 학당, 공리 거창 보통학교[1911년 설립], 거창 공립 심상 소학교[1913년 설립], 월천 공립 보통학교[1932년 설립], 거창 문월 간이 학교[1939년 설립] 등이 설립되면서 지역민의 문맹 퇴치와 근대 교육의 기반이 되었다.

[거창 민중 운동과 독립운동가: 광복 이전]

1920년부터 광복 이전까지 전개된 거창 독립운동은 농민 운동, 청년 운동 등 다방면에서 전개되며 항전을 거듭했다. 1920년 ‘군정서 의용병 및 자금 모집 사건’으로 거창 교회에 부임했던 주남선 목사가 체포되어 일제의 감시를 받았고, 거창 지역 농민층에서는 소작 상조회를 창립하여 혁명적 농민 조합 운영과 민족 해방 운동을 전개했다. 청년 운동은 지역 강연회 개최, 야학 개설로 식민 교육에 맞서는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군자금 조달과 청년 운동, 광복군 활동 등에 투신한 독립운동가로는 신종섭, 박달준, 정은상, 신병항, 유몽룡, 임유동, 신성, 신숙범, 장부회, 주남선 목사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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