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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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長沙上陸作戰 |
영어공식명칭 | Jangsa Landing Oper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0년 9월 15일 - 장사상륙작전, 문산호 장사리 해변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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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0년 9월 19일 - 장사상륙작전 유격대원 철수 |
발생|시작 장소 | 장사해안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
종결 장소 | 장사해안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이명흠|학도병 |
[정의]
1950년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일어난 전투.
[역사적 배경]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같은 해 8월에는 낙동강 일대까지 밀렸다. 낙동강 일대에서 국군과 북한군은 약 1개월 반 동안 치열하게 싸웠다. 낙동강 전투에서 전세를 뒤집기 위하여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8월 30일에 인천상륙작전을 실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상륙작전 날짜는 1950년 9월 15일이었다.
[경과]
1950년 9월 유엔군에게는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낙동강 동부전선에서 일어나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하지만 낙동강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위기에 투입할 병력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육군본부에서는 9월 초에 정규부대가 아닌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독립유격대 제1대대를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하는 작전[작전명 제174호]을 세웠다. 독립유격대 제1대대는 8월 말에 경상남도 밀양에서 이명흠 대위가 편성하였다. 명령에 따라 9월 14일 오후 4시 무렵 유격대원을 태운 문산호[해군 LST: 상륙용 함정]는 부산항에서 출발하였다. 그리고 미 해군 구축함 엔디코트(Endicott)함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15일 새벽 5시쯤 장사리 해안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태풍이 몰고 온 심한 파도에 휩쓸려 좌초되었다. 이때 장사리를 점령하고 있던 북한군의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유격대원들은 30여m에 이르는 해안가 소나무까지 줄을 연결하면서 어렵게 상륙을 시도하였다. 결국, 북한군의 총탄을 뚫고 10여 시간의 사투 끝에 상륙에 성공하였다.
지상으로 올라온 유격대원들은 6일간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 끝에 북한군의 보급로를 끊고 후방을 교란하여 북한군 제2군단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역부족으로 유격대원들은 상륙 사흘 만인 19일에 좁혀오는 포위망을 뚫으면서 110명의 부상자를 포함하여 640여 명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대기 중인 조치원호를 타고 20일 오전 6시에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결과]
장사상륙작전에서 유격대원 9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39명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상륙함 문산호를 잃었으며 철수할 때 조치원호에 미처 오르지 못한 39명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국군은 북한군 270여명을 사살하였고, 4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의의와 평가]
장사상륙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한 결과 북한군 대부대를 유인하여 전선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러한 효과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이 반격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장사상륙작전은 국가가 위태로울 때 나이 어린 학도들이 스스로 참전하여 살신성인의 희생정신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