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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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起南 |
영어공식명칭 | Choe Gi-nam |
이칭/별칭 | 여숙(與叔),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필기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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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 남 |
생년 | 1559년(명종 14) |
몰년 | 1619년(광해군 11) |
본관 | 전주(全州) |
대표관직 | 병조좌랑 |
묘지 |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 |
[정의]
조선 전기 성남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 자는 여숙(與叔)이고 호는 만곡(晩谷), 만옹(晩翁), 양암(養庵)이다. 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며, 아들은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이다.
[활동사항]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호남의 선비들이 왕의 뜻에 거슬러 하옥되자 소두(疏頭)가 되어 수차례의 상소로 이들을 석방시켰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의 건저(建儲) 문제로 서인이 실각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잃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이르러 비로소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다.
1602년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보임 받았다가 병조좌랑에 올라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이후 시강원사서,문학, 형조정랑,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1605년(선조 38) 시사에 연루되어 함경도북평사에 좌천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헌부장령, 홍문관수찬, 교리를 거쳐 황해도 암행어사, 영흥부사를 지냈으나 1613년(광해군 5) 이이첨(李爾瞻)으로 인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삭직되자 향리에 은둔하였다.
[묘소]
묘와 신도비가 성남시 수정구 신촌동에 있다. 신도비는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짓고 김의신(金義信)이 썼는데, 1650년(효종 1)에 세웠다
[상훈과 추모]
후에 아들 최명길의 훈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