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0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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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車智澈 |
영어공식명칭 | Cha, Ji-Chu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항순,윤두섭 |
[정의]
1934~1979. 군인. 국회의원.
[생애]
1934년 경기도 이천에서 출생한 차지철은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하여 갑종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미국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고 국학대학교 정치학과와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공수부대 대위시절 5·16군사정변 당시 박치옥 공수단장의 소개로 박정희 장군의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정치에 입문하였다. 1962년 예편하여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때 민주공화당 전국구의원으로 국회에 처음 진출하였다.
그 후 1967년과 1971년에 각각 실시된 제7대·제8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제5지구선거구(광주군·이천군)에서 민정당의 신하균(申河均) 후보와 신민당의 유기준(兪棋濬) 후보 등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1973년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제4선거구(여주군·이천군·광주군) 선거에서는 차지철 후보가 1위로, 오세응(吳世應) 후보가 2위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8년까지 4선의원을 지낸 차지철은 35세이던 1969년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았으며,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을 계기로 경호실장 박종규가 인책되자 그 후임으로 1974년 8월 22일 제3대 경호실장이 되었다.
박정희 정권시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다가 1979년 10·26사태 당시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재직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함께 피살되었다.
[활동사항]
차지철은 대통령 경호실장을 맡으면서 대통령 신변경호 차원을 넘어 ‘정권의 파수꾼’ 역할을 자임하고 그의 방에는 ‘각하를 지키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다’는 표어를 붙였었다. 그는 대통령의 권위를 빌려 경호실의 역할과 위상을 확장시켰는데, 경호실장 지위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는가 하면 ‘대통령 경호 위원회’라는 특별기구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장, 국방장관, 내무장관, 검찰총장, 치안본부장, 육해공군 참모총장 등이 위원을 맡고 스스로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권력 핵심 2인자의 위세를 과시했다.
경호부대는 탱크, 장갑차, 헬기 등 사단 규모의 화력을 갖추었으며 민간인 신분인 경호실장이 수경사 병력을 지휘할 수 있도록 관련법도 제정하였다. 차지철은 당시 경호부대 ‘30 경비단’의 연병장에서 국회 요인, 정치인, 장관, 군 장성 등을 수시로 불러 ‘국기 하기식’이라는 행사를 치르면서 스스로 권력 2인자임을 세상에 과시하기도 했다.
차지철은 5년 2개월여 동안 경호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월권행위로 대통령 비서실과 중앙정보부와의 마찰이 잦았다. 재야와 야당문제에 대해 강경일변도로 대응했으며,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하고 19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가 나자 군 명령계통을 무시하고 공수부대원을 투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그는 국회, 행정부, 군 인사 등을 좌지우지하고 야당에 정치공작을 펼치는 등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는 2인자로서 권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유신시대의 종말을 재촉한 도화선으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