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0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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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狷墓-神道碑 |
이칭/별칭 | 조견의 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민식 |
성격 | 능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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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방형분 |
건립시기/일시 | 1425년 |
관련인물 | 조견 |
높이 | 1.8m |
지름 | 5.4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
소유자 | 평양조씨 송산공5파종회 |
[정의]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에 있는 조견의 묘 및 신도비.
[개설]
조견[1351~1425]은 고려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종견(從犬), 호는 송산(松山)이고, 초휘(初諱)는 윤(胤)이다.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1227~1308]의 증손이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덕유(趙德裕)[1314~1352]의 아들이며, 영의정 조준(趙浚)[1346~1405]의 동생이다. 한때 승려가 되었으나 다시 환속해서 1371년(공민왕 20) 문과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영남안렴사(嶺南按廉使)를 지냈다. 형인 조준(趙浚)[1346~1405]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 조선을 건국한 후 개국공신 2등에 상장군(上將軍)이 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다.
1411년(태종11) 평성군(平城君)으로 개봉(改封)된 후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421년(세종3)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진하사(進賀使)와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한때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며 양주(楊州)의 송산사(松山祠)에 제향(祭享)되었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다. 자기 이름자를 윤에서 견으로 고쳤는데,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는 것은 개라는 뜻과 또는 개는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이라 하였다. 후에 양주 청계산에서 살 때 태종이 청계산까지 친히 찾아가 권했으나 굽히지 않고 뒤에 양주의 송산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견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견의 상여를 메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명정이 날아갔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 따라가 보니 지금의 여수동 뒷골 견의 묘가 있는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후손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곳에다 묘를 썼다고 한다. 그는 임종할 때 “내 묘표에는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쓸 것이지 새 조정의 벼슬 이름은 쓰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조준(趙浚)[1346~1405]이 이조(李朝)의 개국공신, 호조판서라고 비석을 세웠더니 어느 날 뇌성벽력이 치며 비석을 깨뜨렸다고 한다.
[위치]
묘역은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에 위치한 해발 90m 가량 나지막한 응봉(鷹峰)의 서쪽 구릉에 정남향(正西向)하여 자리 잡고 있다. 하단에는 같은 형태의 배정선택주파평윤씨(配貞善宅主坡平尹氏)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형태]
묘역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유행대로 3단의 계체석(階砌石) 구조를 갖추었으며 방형(方形)의 봉분 형태이며, 상돌, 문인석, 장명등의 옛 석물이 진설(陳設)되어 있다. 사각 둘레돌이 설치된 봉분의 주변에는 곡장(曲墻)의 기단과 장방형(長方形) 형태의 주초석(柱礎石:높이 102㎝)이 남아 있다. 2단의 묘정(墓庭)에 상돌(높이 28㎝)과 문인석을 그리고 3단의 묘정에 장명등을 두었다. 방형의 봉분은 총 높이 180㎝로 봉분 하단에는 4면에 각 3매씩의 장대석으로 높이 40㎝의 둘레돌을 마련하였으며, 봉분 하단의 크기는 앞뒤 410㎝, 좌우 540㎝이다. 또한 봉분 주위로 좌·우·후 3면에는 90㎝의 간격을 두고 60∼110㎝ 높이의 축대를 쌓아 활개를 대신하고 있으며, 봉분 좌우에는 높이 1m, 너비 54㎝, 두께 35㎝의 석주를 세워놓고 있다.
봉분 좌우에 세워져 있는 안두(按頭)의 문인석(文人石)은 좌가 높이 148㎝, 얼굴부분 52㎝로 3등신의 신체 비율이며 좌측 귀가 파손되어 있다. 우도 마찬가지 형태로 턱수염의 표현을 하였으며 어깨부분에서 넓이 54㎝로 최대를 이루고 있다. 복두공복(幞頭公服)을 착용하고 있으며, 얼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몸집이 상체에서 하체로 내려갈수록 가늘어지는 양식상의 특징이 있다. 또 장명등(높이 76㎝)은 지붕돌이 없어지고 화사석(火舍石)의 윗 부분이 훼손된 상태이다.
[금석문]
봉분 앞의 옛 묘표(높이30㎝)는 비신(碑身)이 절단되어 그 하단의 ‘……公之墓(공지묘)’라는 부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1980년 10월 봉분의 오른쪽에 묘표와 묘갈을 각각 세우고 묘역 입구에는 귀부이수(龜趺螭首) 양식의 화려한 신도비를 건립하였다.
봉분 좌측으로 근래에 세운 2기의 비가 있는데 모두 서향(西向)하여 있다. 2기의 비중 묘표는 비좌와 비신 월두의 형태이다. 백색화강암의 비좌는 크기 20×74×47㎝이다. 오석(烏石)의 비신은 전·후·좌 3면에 비문이 있으며, 앞면에 세로 이열로 ‘高麗嶺南按廉使平壤趙公之墓 配貞善宅主坡平尹氏?于階下'(고려영남안렴사평양조공지묘 배정선택주파평윤씨부우계하)하여 묘주를 밝히고 있으며, 크기는 140×45×14㎝이다.
묘표 하단의 묘갈은 백색화강암의 비좌와 오석(烏石)의 비신 및 8작 지붕 형태의 지붕돌[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신은 4면에 비문이 있으며 상단에는 4면에 걸쳐 전서(篆書)로 ‘松山先生按廉使府郡墓碣'(송산선생안렴사부군묘갈)이라 새겨져 있으며, 비제는 ‘十八代祖考松山先生高麗按廉使府郡墓碣'(십팔대조고송산선생고려안렴사부군묘갈)이다. 크기는 비좌 높이 34㎝·너비 90㎝·두께 60㎝, 비신 높이 145㎝·너비 55㎝·두께 20㎝, 지붕돌 높이 52㎝·너비 84㎝·두께 55㎝이며 총 높이는 231㎝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묘역 입구에 서향(西向)하여 백색화강암의 귀부와 오석(烏石))의 비신 및 이수를 갖추고 있다. 귀부는 3단의 기단석 위에 마련되어 있는데 귀갑(龜甲)은 복련문이며 중앙에 복련의 비좌공을 마련하여 놓았다. 용의 머리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데 신부(身部)에서 86㎝ 가량 나와 있다.
비신은 4면에 비문이 있으며 4면 상단에 전서(篆書)로 ‘松山先生高麗按廉使趙平簡公神道碑'(송산선생고려안렴사조평간공신도비)라 하였고, 비제는 ‘十八代祖考松山先生高麗嶺南按廉使平簡公府郡神道碑'(십팔대조고송산선생고려영남안염사평간공부군신도비)이다. 이수는 발가락이 4개씩인 쌍용(雙龍)이 서로 마주보고 좌우 입을 벌려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크기는 비신 높이 206㎝·너비 74㎝·두께 45㎝, 이수 높이 70㎝·너비 104㎝·두께 73㎝이다.
신도비문은 예손(裔孫)인 조병호(趙柄鎬)가 근기병서전(謹記幷書篆) 한 것으로, 글씨가 매우 뛰어나다.
[현황]
현재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 30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양조씨 송산공5파종회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