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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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孝伯墓 |
이칭/별칭 | 이효백의 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16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주홍 |
성격 | 능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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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원형 쌍분 |
건립시기/일시 | 1487년 |
관련인물 | 이효백 |
높이 | 2.4m |
지름 | 5.5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 산 16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있는 이효백의 묘.
[개설]
이효백(李孝伯)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33(세종 15)~1487(성종 18)에 걸쳐 살았던 인물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희삼(希參)으로, 정종의 제10왕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이효백(李孝伯)이라 명명되었다. 궁술이 비상하여 1459년(세조 5) 왕의 참관 하에 모화관(慕華館)에서의 활쏘기대회에서 30발의 화살 중 29개를 과녁에 적중시켜, 감탄한 세조의 특명으로 당상관에 올랐다. 그뒤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오르고 1467년 신종군(新宗君)에 봉하여졌다. 그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세조가 친정(親征)하려 할 때 선봉장으로 내정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468년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랐다. 묘소는 그가 늘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인데, 하루는 문득 이곳에 올라 작은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사방을 둘러본 후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이곳에 장사지내라 하였다 한다. 또 하루는 활시위를 당기다가 갓끈에 부딪혀 갓끈의 큰 구슬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장례시 광중(壙中)에서 그 구슬이 나왔다고 한다.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위치]
묘소는 석운동 대한송유관공사 못 미쳐 오른쪽의 나지막한 구릉에 동남향(東南向)하여 있다.
[형태]
봉분 높이 240㎝, 직경 550㎝로 배위(配位) 예안현부인 최씨(禮安縣夫人 崔氏)의 묘와 원형의 쌍분으로 용미와 활개를 갖추고 있다. 묘역에는 혼유석, 상돌, 향로석, 장명 등이 있고, 상돌 좌우로 8각 망주석과 문인석 각 한 쌍 등 다수의 석물을 갖추고 있으며, 3m의 거리를 두고 2단의 계체석을 두었다. 이들 다수의 석물 중 문인석은 복두(幞頭)에 얼굴 계란형이며 코는 크고 뭉툭하며 옷소매가 길다. 크기는 좌가 203㎝, 얼굴 64㎝이며, 우는 같은 형태에 194㎝, 얼굴 부분이 58㎝이다.
[금석문]
묘표는 쌍분 중앙과 좌측에 2기가 세워져 있는데, 이중 쌍분 중앙에 있는 원래의 묘표는 비좌와 일석(一石)의 비신 및 화관석(花冠石)을 갖추고 있다. 비신의 비문은 앞뒤 양면에 있으며 앞면의 비문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 가능한 글자는 몇 자 안된다. 건립연도는 1504년(연산군 10)이다. 비의 총 높이는 145cm로, 비좌 높이 16cm, 너비 62cm, 두께 41cm, 비신 높이 81cm, 너비 53cm, 두께 25cm, 화관석 높이 48cm, 너비 61cm, 두께 34cm이다.
[현황]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석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묘소에서는 묘지석(墓誌石)이 출토되어 현재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1487년(성종 18)에 제작된 것으로 청화백자에 음각하였다. 지석은 모두 6편인데 첫번째 지석을 분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