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8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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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潗墓 |
이칭/별칭 | 이집의 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식 |
성격 | 능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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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원형 단독분 |
건립시기/일시 | 1727년 |
관련인물 | 이집 |
높이 | 1.5m |
지름 | 5.6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소유자 | 한산이씨 한평군파 종중회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이집의 묘.
[개설]
이집[1670~1727]은 영조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계통(季通), 호는 한주(韓州)이다. 아천군(鵝川君) 이증(李增)[1525~1600]의 현손이자 김제군수(金堤郡守) 이정룡(李廷龍)[1629~1689]의 아들이며 부평부사(富平府使) 이오(李澳)[1659~1720]의 동생이다. 또한 정조(正祖)의 외조부(外祖父)인 영의정 홍봉한(洪鳳漢)[1713~1778]의 장인이다. 1699년(숙종 25)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703년 음직(蔭職)으로 목릉침랑(穆陵寢郞)에 제수되었다. 1725년(영조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당쟁의 와중에서 청주목사·한성부우윤을 역임한 뒤 이듬해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 그해 5월 황해도관찰사에 전임되어 민생의 구제에 부단한 노력을 쏟다가 1727년 임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저서로는 『한주집(韓州集)』 영본(零本) 7책이 있다.
[위치]
이집 묘는 수내동 중앙공원에 위치한 한산이씨 세장지내에 한성군(韓城君) 이질 묘 바로 하단에 남서향(南西向)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형태]
묘역은 원형의 단독분 형태이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150㎝, 직경 560㎝이다. 묘역에는 상돌(높이 95㎝, 너비 50.5㎝, 두께 46㎝), 향로석(높이 34㎝, 너비 40㎝, 두께 31㎝), 망주석(높이 182㎝ 너비 40.5㎝, 두께 40㎝), 배설석(排設石)의 옛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혼유석은 매몰된 듯 육안으로 확인이 되지 않고, 고석은 근래에 새로 설치하였다. 묘역의 오른쪽에 동일한 규모(너비 103㎝, 두께 55㎝)의 화강암 판석 두 개를 세로로 나란히 놓고 배설석으로 사용하였으나 많이 매몰되어 윗면만 겨우 남아 있는 실정이다.
상돌 앞에 놓인 사각향로석과, 묘역의 좌우에 세워진 팔각망주석의 문양 조각이 사실적이고 매우 화려하다.
[금석문]
상돌의 앞면 중앙에 팔분서(八分書)로 ‘觀察使李公潗墓石’(관찰사이공집묘석)이라 쓰고 그 좌우에 음기(陰記)를 소해(小楷)로 새겼다. 그리고 좌에 ‘廣州上突馬艮龍艮入首艮坐坤向丙巽得水酉破穿山丙寅’(광주상돌마간용간입수간좌곤향병손득수유파천산병인), 우에 ‘分金丁丑丁未歲丁未六月十七日午時安定戊申二月立石’(분금정축정미세정미육월십칠일오시안정무신이월립석)’의 명문(銘文)이 있다. 음기에 의하면 상돌은 1728년(영조 4)에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봉분의 오른쪽에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장방형의 받침돌과 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갖춘 양식]의 묘표(높이209㎝)가 건립되어 있다. 묘표는 비좌와 비신 및 8작 지붕 형태의 지붕돌[옥개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4면에 당초문이 있고 상부에 전후 3엽, 좌우 1엽의 대형 단판복련문이 수려하게 조식되어 있다. 정방형(正方形)에 가까운 회색 대리석의 비신(높이133㎝, 너비45.7㎝, 두께 44.7㎝)은 마멸이 심하여 앞면에 쓰여진 큰 글씨만 겨우 확인될 뿐, 나머지는 전혀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비신의 앞면에 세로 넉 줄로 ‘有明朝鮮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海州牧使韓州李公諱潗之墓 貞夫人杞溪兪氏祔左’(유명조선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겸병마수군절도사순찰사해주목사한주이공휘집지묘 정부인기계유씨부좌)라 기록 되어 있다.
[현황]
현재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산이씨 한평군파 종중회에서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