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1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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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秉泰墓 |
이칭/별칭 | 이병태의 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손환일 |
성격 |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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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원형 쌍분 |
건립시기/일시 | 1733년 |
관련인물 | 이병태 |
높이 | 1.7m |
지름 | 4.6m |
소재지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산1-2 |
소유자 | 한산이씨 종친회 |
문화재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
문화재 지정일 | 1989년 12월 29일 |
[정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에 있는 이병태의 묘.
[개설]
이병태[1688~1733]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유안(幼安), 호는 동산(東山)이다. 이색(李穡)의 12대손이며, 진사 이협(李浹)의 아들이다. 1715년(숙종 41) 진사시에 합격하고, 1723년(경종 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홍문관부제학지제교 겸 경연참찬관대사성 등을 지냈다. 1727년(영조 3)에 예조참의, 호조참의를 거쳤고 1730년 경상도관찰사를 배수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부임을 사양하였다. 이듬해 승지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퇴하고자 하여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합천군수로 좌천되었다. 현지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합천의 군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워 춘추(春秋)로 제를 올렸고, 평소 강직 결백하고 검소한 생활을 신조로 삼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너무 가난하였기에 임종한 후 우의정 조현명(趙顯命)이 영조에게 아뢰기를 굶어 죽었다 하였고, 장례 비용이 없어 감사 한지(韓祉)가 왕에게 아뢰어 장례를 치르도록 부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조판서, 홍문관대제학에 추증하고 문청(文淸)이란 시호를 내렸다.
[위치]
이병태의 묘는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중앙공원 내에 남향하여 있다.
[변천]
1989년 12월 수내동 세거성씨인 한산이씨의 묘역이 경기도 기념물 제116호로 일괄 지정되어 중앙공원 내에 조성되었다.
[형태]
이병태 묘는 부인 진주유씨(晋州柳氏)와의 쌍분 형태이며, 용미와 활개를 갖춘 원형의 봉분의 크기는 높이 170㎝, 직경 460㎝이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묘표, 혼유석, 상돌, 6각 향로석이 있고, 상돌 좌우에 8각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이 있다. 상돌은 문고리 문양이 사면에 양각된 2개의 고석이 받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44㎝, 너비 140㎝, 두께 93㎝이다.
향로석은 교자상 형태로 크기는 높이 48㎝, 너비 34㎝이다. 망주석은 8각으로 석수가 양각되어 있고 크기는 좌 197㎝, 우 200㎝이다. 문인석은 안두(按頭: 이마에 멍울이 생겨 불룩 튀어나오고 정수리가 움푹 들어가서 길마 모양이 된 머리)형으로 좌우가 높이 168㎝, 얼굴 부분 56㎝이다. 이목구비는 뚜렷하며 큰 눈에 짙은 눈썹과 작은 입은 꾹 다문 근엄한 표정이다. 오른손이 왼손을 덮고 있으며 손가락의 표현이 있다. 홀(笏)은 턱에 괴고 있으며 기다란 옷소매는 발목에까지 내려오고 있는데, U자형의 부드러운 의문(衣文)을 표현하였다. 좌측의 문인석은 안면이 흑황색으로 변색되어 있다.
[금석문]
묘표는 비좌와 비신 월두형으로 근래에 마련된 것이다. 비신의 비문은 전면에만 있는데, 세로 네 줄로 ‘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兼經筵參贊官知製敎淸白吏贈資憲大夫吏曹判書諡文淸韓山李公秉泰之墓 贈貞夫人潘南朴氏祔左 贈貞夫人晋州柳氏祔左’(통정대부홍문관부제학겸경연참찬관지제교청백리증자헌대부이조판서시문청한산이공병태지묘 증정부인반남박씨부좌 증정부인진주유씨부좌)의 비문이 있다.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