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4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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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山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집필자 | 문수진 |
[정의]
경기도 성남시에 세거하는 성씨의 하나.
[유래]
광산(光山)은 현 光州로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한다. 광산김씨는 고려조에서 8대 평장사를 배출하고, 조선조에서 왕비 1명, 상신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 공신 7명, 문과 급제자 265명을 배출했다. 여말 선초에 김약채(金若采), 김약항(金若恒), 김약시(金若時)의 3형제 대에서부터 번창하기 시작했다.
[세거지]
성남에는 김약시의 후손이 세거하기 시작했다. 김약시는 조선조에 들어와 벼슬을 단념하고 두문동 72현에 들기도 하면서, 현 중원구 금광동에 은거하였다고 한다.
김약시의 손자 김순성(金順誠)[1429~1481]의 후손은 간이골에 거주하여 세거하고 있다. 이들 마을은 남향으로 현재 복개된 도로 쪽은 논과 밭으로 되어 있는 경작지이고, 언덕 쪽은 주거지였다고 한다. 주거지 대지는 도시개발 때에도 그대로 환지를 받았기 때문에 현재도 가옥의 구조가 각기 다르고 도로가 반듯하지 못하고 꾸불꾸불하다.
이밖에 양지동에도 약시의 후손이 분가하여 세거했으며 분당구 삼평동 미듬골에도 세거지가 있다.
[집성촌]
김순성의 후손들은 대대로 금광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신 주거지가 형성되기 전까지 현 금광 2동에 43가구 중 15호가 광산김씨였다. 금광동이라는 이름도 흔히 “금괭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광산김씨의 마을, 광김의 마을, 거꾸로 “금광(金光)”이라 부른데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물]
김약시의 아들 김췌(金萃)는 목사, 김절(金節)은 현감, 김원우(金元祐)는 감부를 지냈고 손자 김순성은 평양부서윤 겸 평양진병마수군첨절제사(平壤 副庶尹 兼 平壤陣 兵馬·水軍 僉節制使)를 지냈다. 5세손 김지남(金止男)[1559-1631]은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였고, 저서로 『용계집(龍溪集)』을 남겼다.
[묘역]
성남시가 개발되기 전까지 선조 약시의 묘는 현 신구대학 본관자리에 있었고 광산김씨의 선산을 이루었다. 도시개발과 함께 이들 묘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 실촌면 삼합리 공민산(恭愍山)으로 옮겼다. 또한 김순성의 배위 묘가 창곡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