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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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淸溪堂-碧巖大使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집필자 | 박순임 |
[정의]
[내용]
청계당은 벽암대사 김각성(金覺性)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남한산성 안에 건립되었던 사당이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가 없어지고 이야기만 전한다.
벽암대사는 조선시대 명승으로 임전왜란 때는 스승과 더불어 승병으로 참전하였고 광해군 때는 봉은사의 주지와 판선교도총섭(判禪敎徒摠攝)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병자호란 때는 의승병 삼천을 모아 항마군을 만들고 분전하였다.
벽암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가에 귀의하지 않으면 단명한다 하여 14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명승 문하에서 불도와 무술을 연마하였다. 광해군 때 무과에 응시하여 당시 염탐하러 와 있던 용골대와 최종까지 겨루어 장원급제하고 팔도도총섭이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폭정에 실망하여 다시 금강산에 입산하였다.
어느 날 벽암의 꿈에 부처님이 현몽하여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일어날 것이니 나라와 사직을 구하도록 성벽을 쌓으라고 하였다. 벽암은 깜짝 놀라 인조를 배알하고 남한산성을 쌓아 3년 만에 완성하였다. 조정에서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병자호란 이 일어나자 벽암은 의승을 모집하여 분전하였는데 부평벌에서 적병과 크게 싸움이 있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벽암은 양군의 대장끼리 승부를 겨루자고 외쳤다. 적장은 다른 사람 아닌 용골대였다. 다음 날 싸우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용골대는 전날 자신을 살려 준 것에 감사하여 그 보답으로 오늘은 물러간다는 편지를 남기고 떠나가 버렸다.
그 후 벽암은 인조가 항복하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후세 사람들이 벽암대사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청계당을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