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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주민교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55
한자 城南民主化運動-證人住民敎會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 7288-11[수정로 177-8]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류제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연도/일시 1973년 3월 1일연표보기
설립자 이해학 전도사[男, 한국 특수지역 선교위원회]
설립목적 성남지역 민중선교
조직 한국기독교 장로회 주민교회|생활협동조합|외국인노동자의 집
주요업무 선교|이주 노동자운동|소비자운동[생협]
전화 031-755-2404
팩스 031-758-4628
홈페이지 주민교회(http://www.jumin.org/)

[정의]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2동에 있는 교회.

[개관]

1973년 초 한국특수지역 선교위원회(위원장 : 박형규 목사)는 성남지역 민중선교를 위해 이해학 전도사를 보내 3월 1일 성남시 수진동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를 설립하였다. 주민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의료 선교활동, 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자치모임(아카시아회) 조직 등 성남지역 빈민,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대한 이해학 전도사와 주민교회의 민주화 요구와 저항은 갖은 탄압과 억압을 불러왔다. 1980년에는 김종태 청년회원이 신촌로터리에서 광주민주항쟁과 민주정치를 절규하며 분신하여 몸으로 대항하였고, 주민교회는 민주화운동과 성남YMCA 창립(1981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1987년) 등에 주도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또한, 1994년에는 ‘성남 외국인노동자의 집’을 개소하여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권과 인권 보호를 위한 사업을 전개하고,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오고 있다. 이와 같이 주민교회는 성남시민과 함께 민주와 통일에 앞장서 온 한국현대사의 주역이며 산 증인이다.

[설립경위]

1960년대 말부터 성남지역에는 본격적으로 서울의 철거민, 빈민들이 이주하게 되었고, 1971년에는 광주대단지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런 도시 빈민과 철거민문제의 폭발은 1970년 11월 평화시장의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면서 분신한 사건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압축적 산업화정책과 ‘선 성장 후 분배’의 수탈적 개발독재에 대한 생존을 위한 저항이었다.

이와 같은 저항은 지식인과 종교인들이 노동문제, 도시빈민문제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일부 기독교단체에서는 인천 등 수도권을 중심으로 도시산업 선교와 빈민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1973년 한국 특수지역 선교위원회는 ‘광주대단지사건’으로 드러난 성남지역 도시빈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성남지역 민중선교를 위해 이해학 전도사를 파송하여 교회 설립을 준비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수진동 26-84에서 이점례 등 교인 12명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 주민교회가 설립되었다.

[활동사항]

주민교회는 설립 초기부터 명성의원 최형주 원장의 지원으로 의료선교활동을 하고, 박경숙을 중심으로 한 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자치모임(아카시아회)을 결성하는 등 도시빈민과 노동자를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하였다. 특히, 이해학 전도사는 재미교포 신문복사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15일간 구금되기도 하고, 성탄절에 김포공항에서 교인 20명과 함께 대일경제예속 반성을 촉구하는 예배를 드리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 1970년대: 1974년 이해학 전도사는 민주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975년 2월 형집행 정지로 출감하였다. 당시 실업과 빈곤 문제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른 상태였다. 주민교회에서는 직업상담실, 실업자대책위원회 구성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남 주민들의 취업 알선과 취로사업 참가를 위한 노력을 하는 한편, 노동자를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하여 노동자들의 배움의 열망을 다소나마 충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주민야간학교’는 노동자들의 청원에 따라 발아되었으며, 기독학생회 총연맹 등 각계의 지원 속에서 노동자 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 내내 지속된 유신정권의 이해학 전도사와 주민교회 교인들에 대한 구속과 탄압 속에서도 주민교회는 1979년 ‘주민공동체헌장’을 제정하고, 주민교회 신용협동조합(이사장 김금용, 감사 이해학, 임유순)을 창립하는 등 교세 확장과 발전을 지속하였다. ‘주민공동체헌장’에서는,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을 믿으며”, “소외된 민중들의 이웃이 되고 억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죄악의 세상과 싸우시다 십자가에서 사형당한 하나님의 아들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헌장의 주민공동체 목표 성구(「누가복음」 4장 18절~19절)에서는, “빈민선교, 정의실현, 의식화, 인권 회복, 새 역사화”를 제시하고 있다. 이는 1970년대 이래 주민교회 선교와 민주화운동의 지침이자, 기독교 신앙적인 근거로서 실천되어 왔음을 주민교회의 1980년대 이후의 역사에서도 알 수가 있다.

(2) 1980년대: 1980년대 초 군사 독재정권의 폭력적 지배하에서도 주민교회는 굴종과 은둔을 거부하였다. 노동자인 청년회원 김종태는 신촌로터리에서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은 물러가라!”, “노동삼권 보장하라” 등을 외치며 분신으로 저항하였으며, 주민교회 교인들은 매년 그를 추모하는 예배와 각종 시국기도회, 개헌서명운동 참여 등으로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였다.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주민교회의 설립 목적이기도 한 노동자, 빈민을 위한 지역운동도 지속적으로 벌여나갔다. 1984년 4월 이상락, 이태영의 주도로 ‘성남인력센터’를 개소하였는데, 이는 후에 복정동 인력시장을 거쳐 전국적인 ‘건설산업노동조합’의 모태가 되었으며, 1985년 기독교 도시빈민선교협의회 창립(회장 이상락 집사), 1986년 성남지역 노점상연합회 창립(회장 임용제)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87년은 그동안 끊임없이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을 해온 대학생, 시민, 노동자 등 민중진영과 독재정권의 역사적 대결의 시기였다. 4.19, 5.18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킨 6.10 민주항쟁과 7, 8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민주와 반민주, 친미와 자주세력의 대결이라는 구도 속에서 전국적으로 시민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이 ‘현장’에 주민교회는 성남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적 연합체로서 서울의 서울역, 광화문, 명동, 시청 등의 거리를 꽉 채운 ‘민주시민연합’에 참여하였다. 예를 들어, 6월에 결성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성남지역본부’에도 이해학(의장), 이상락(집행위원장), 한숙자(사무국장) 등 주민교회 교인들은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민주화 및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기독교적, 민중적 실천은 주민교회와 성남지역 주민과의 연대의식을 강화, 확대시키면서, ‘주민생활협동조합’을 1990년 10월 7일 결성하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가공식품과 수입 농산물, 각종 식품 첨가물의 위험으로부터 생명을 지키고, 도농 직거래 등 농산물 유통의 개선 등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주민 신협과 더불어 주민생활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사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생산자 조합과 신협을 포괄하는 종합 협동조합을 지향해나갔다. 또한, 생협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이 어느 정도 한국 사회에서 성과를 거두었으며, 한국이 대중 소비사회로 진입한 현실에 대응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3) 1990년대 : 1994년에는 주민교회의 새로운 선교사업이자 노동자문제에 대한 지속적 관심과 지원의 연장선의 성격을 지니는,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사장 이해학 주민교회 목사, 소장 김해성 산자교회 목사)을 개소하였다. 이는 1993년 3월 산자교회에서 운영하는 노동상담소 ‘희망의 전화’에 국내 취업중인 이주 노동자의 상담사례가 급증하면서 시작되었다. 산자교회의 제안으로 주민교회와 함께 보다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이주 노동자 상담과 지원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준비모임에서 이주 노동자 상담소는 교회 차원의 선교기관보다 여러 뜻있는 인사들과 함께 성남지역의 모임으로 재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지역인사를 포함한 이사진을 구성하여 창립하게 되었다. ‘성남 외국인 노동자의 집’은 이주 노동자의 체불 임금. 폭행 피해, 산재 등의 부당 노동행위 구제뿐만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와 노동권 보장, 생활편의 제공 등을 실천해오고 있다.

또한, IMF 구제금융기에는 실직자들을 위하여 ‘내일을 여는 집’을 개설하여, 대규모 부도사태와 실업 등 노동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좌절과 삶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현황]

2000년대에도 성남 주민교회는 ‘용산미군기지 성남 이전 결사반대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남북 평화통일운동과 이주 노동자운동에 적극적으로,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런 발자취 속에서, 주민교회는 1986년에는 산자교회(김해성 목사)를 개척하여 노동선교를 전담하도록 하고, 1994년에는 교육선교를 전담하는 느티나무교회(김종수 준목)를 개척하여 교육선교를 담당하게 하는 등 교세 확장과 선교 활동의 전문화를 이루어오고 있다.

[의의 및 평가]

성남 주민교회는 지역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민주화운동 : 성남지역 민주화운동의 본거지로서 기능하였고, 민주화운동의 지역 확산에 이바지하였다.

(2) 노동자, 빈민 선교 : 노동자 선교는 1960, 1970년대에 서울 구로구, 인천 등 수출공단지역의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실천하여왔다. 그러나, 대표적인 이주민 도시이자 그 주민들이 소규모 기업에서 노동하고 있는 성남지역의 노동자와 빈민 선교는 주민교회가 목적의식적으로 선도하여왔다.

(3) 외국인 노동자운동 : 이주노동자 문제는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성남 주민교회는 이주노동자운동에 참여하여, 1970년대 빈민, 노동자와 유사한 노동조건과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운동을 통해 성남지역과 한국 사회의 인권과 정의를 위한 실천을 해오고 있다.

(4) 주민 연대 활동: 각종 주민단체 결성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참여하여 성남시 주민들의 지역공동체의식과 복지 향상, 애향심 고취에 기여하여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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