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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103
한자 儒敎
영어공식명칭 Confucianism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성남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천

[정의]

중국의 공자(孔子)[B.C. 552~B.C. 479]를 시조로 하여 주(周)의 종법(宗法)제도와 예악(禮樂)문화를 중심으로 집대성한 종교전통.

[개관]

유교적 전통사회는 효(孝)라는 이념 아래 종자(宗子)를 중심으로 하는 혈연적 유대의식[친친(親親)], 조상 공경의 의례를 공유하는 가족공동체, 충(忠)이라는 이념 아래 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적 위계질서[尊尊], 종묘와 사직의 의례를 받드는 국가공동체를 중심축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이러한 인륜공동체(人倫共同體)의 일원으로서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조상으로부터 비롯된 생물학적 생명, 스승으로부터 교육받은 문화적 생명, 임금에 의해서 보장받는 정치사회적 생명의 총화다. 따라서 조상, 스승, 임금의 은혜는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한다. 이러한 삶의 근원에는 상제(上帝), 천(天), 천지(天地) 등으로 불리는 우주적 생명의 터전이 자리잡고 있다.

유교적 세계관에 따라 인륜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는 삶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은혜에 보답하는 과정이다. 가묘(家廟), 문묘(文廟), 종묘사직(宗廟社稷), 천단(天壇) 등의 의례적 공간에서 제사를 통해 조상이나 성현, 그리고 하늘과 만나 교류함으로써 인간의 일상적 삶은 거룩하고 의미있게 승화되고, 심성수양을 통해서 하늘이 부여한 천명(天命) 혹은 성(性)에 걸맞는 삶을 실현함으로써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이상이 구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교는 충효의 종교, 가족주의 종교, 도덕종교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고려 중기]

이때는 성남지역의 유교가 제도적으로 수용된 시기였다. 유교는 대략 기원전 2~3세기경에 한반도에 수용되었는데, 성남지역에는 백제가 중앙집권국가로 성장하여 국가제도와 생활풍속을 중심으로 체제정비를 하던 3~4세기경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왕실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신앙과 의례에서 불교와 도교 및 기타 민간신앙 등이 지배적이었고, 소수의 관료와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통치체제와 사회윤리에서는 유교가 중심적이었다.

고려 성종 2년(983년)에는 전국 12목(牧)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파견하였는데, 당시 광주목(廣州牧)이었던 성남지역에도 1명이 파견되어 유교에 관한 교육이 시작되었으며, 인종 5년(1127년)에는 지방에 향학(鄕學)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는데, 이러한 지역적 교육기반은 뒤에 고려 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광주향교(廣州鄕校)[경기문화재자료 제13호, 현재 하남시 소재]로 이어진다. 이에 따라 고려 후기부터는 성남지역에서도 유교적 전통사회의 정치적, 의례적, 교육적 기반이 차츰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말기~조선 전기]

이때는 성리학적 전통사회가 정립된 시기였다. 고려 말기에는 송나라 주자(朱子)[1130~1200]에 의해서 형이상학적 세계관과 실천적 의리사상을 갖춘 사서(四書) 중심의 성리학과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도입되었다. 성리학적 전통사회가 형성되는 여말선초의 성남지역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를 비판하고 사회개혁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성남지역에서는 고려 말까지 성리학의 수용에 따라 유교적 강상명분론(綱常名分論)에 입각한 충절과 의리정신이 주로 발현되었다면, 조선 전기에는 주로 세거집성촌의 성립에 따라 유교적 사회기반을 정립하고 지역적 여건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과거를 통한 정계 진출을 모색하되 청백리정신에 입각한 유교이념의 실천적 경향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말기에는 상촌(桑村) 김자수(金子粹), 둔촌(遁村) 이집(李集), 탄천(炭川) 이지직(李之直), 음촌(陰村) 김약시(金若時), 송산(松山) 조견(趙狷) 등 대체로 청백리정신과 절의정신이 투철한 학자형 유학자가 주도한 반면, 조선 전기에는 문정공(文靖公) 한계희(韓繼禧)북애(北崖) 이증(李增) 등 주로 현실정치에 참여한 관료형 유교인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일제강점기]

이때는 유교적 전통사회가 약화되고 해체되는 시기이다. 16세기 이후 조선 중기부터 성리학적 이해의 심화에 따라 유교적 명분론과 도학(道學)적 정통성에 투철한 사림(士林)의 정계 진출에 따라 붕당정치(朋黨政治)가 성립되면서 조선 사회에 정착했던 유교적 전통사회는 17세기에 벌어졌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은 뒤부터 차츰 약화되었다.

조선 후기 성남지역은 병자호란으로 인해 전쟁의 피해를 심각하게 입은 것은 물론,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이 왕명을 받아 청 태종에게 항복하는 삼전도비(三田渡碑)의 비문을 지어 바치는 정신적 굴욕까지 겪었다. 이로 인해 비타협적 절의정신과 존주론(尊周論)에 입각한 반청의리론(反淸義理論)의 각성이 고조되었고, 각종 정려문(旌閭門)들이 세워졌다. 이 즈음 성남지역은 대체로 중앙에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던 서인, 그 중에서도 노론 계열의 기호학파(畿湖學派)가 성리학으로 주도하는 가운데, 인근 광주권의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실학의 흐름과도 연관되는 독자적 학풍이 등장하였다. 동산(東山) 이병태(李秉泰), 뇌연(雷淵) 남유용(南有容), 금릉(金陵) 남공철(南公轍) 등은 노론 계열로서 중앙정계에서 활약하였다. 이에 비해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는 실천적 도덕성과 합리적 타당성을 추구하는 ‘사필구시(事必求是)’ 정신을 펼쳤고, 그 아들 탄옹(炭翁) 권시(權諰)는 ‘부모를 섬기는 것[사친(事親)]’과 ‘하늘을 섬기는 것[사천(事天)]’을 연계시키고 ‘효제자(孝悌慈)’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의 흐름에 일정하게 수용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 성남지역에서는 영조~정조의 문예부흥적 기풍 아래 양반계층 여성들의 유교적 문화활동이 일어났으며, ‘여인들 중 군자[여중지군자(女中之君子)]’로 불릴 정도로 유교경전 연구와 심성 수련에 힘쓴 여성 도학자 강정일당(姜靜一堂)이 활약하였다.

서구와 일본의 압력이 증가하던 조선 말기에는 성남지역에서도 남상목(南相穆), 윤치장(尹致章), 이명하(李命夏) 등의 유생들을 중심으로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에 입각한 의병활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의병정신은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동안 유교적 이념의 전수와 재생산을 담당했던 교육기반인 향교와 서당 등은 철저하게 붕괴되었으며, 그에 따라 유교적 전통사회는 해체되었다.

[현황]

일제강점기 때부터 급격하게 파괴된 유교적 전통사회의 기반은 성남지역에서는 1960년대 말 광주대단지 개발사업을 거쳐 1973년 성남시가 출범하고 1988년부터 정부의 서울 외곽 신도시 개발에 따라 급속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인해 급속히 파괴되었다. 이때부터 외부인구의 유입, 세거집성촌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성남시에서 유교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1995년 현재 성남시의 유교인구는 1,357명이며, 남자가 782명, 여자가 575명인데, 전국 대비 성남시의 인구 구성비는 1.9%인 반면, 전국 대비 성남시의 유교인구 구성비는 0.6%에 불과해서 다른 지역보다 유교인구가 훨씬 적다.(표 1 참조). 유교인구의 분포율도 총인구대비 0.156%, 종교인구대비 0.304%로 전국분포보다 훨씬 낮다. 이처럼 성남시의 유교인구가 총인구와 종교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낮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성남시의 유교인구는 여성이 남성보다 많은 다른 종교와는 달리 남성이 여성보다 상대적으로 많으며, 젊은 연령층보다는 연령이 높을수록 신자 수가 많아 반 이상(53.2%)이 50세 이상으로 나타났다.

[전망]

통계상 최근 성남시에서 유교의 영향력은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실제로 성남시의 유교인구는 1985년 2,995명에서 1995년 1,357명으로 1,638명(54.7%) 감소했고, 성남시의 유교인구 구성비도 1985년에서 1995년까지 0.66%에서 0.16%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유교는 다른 종교와는 달리 느슨한 조직 결속력과 구성원 요건으로 인해 제사를 제외하면 정기적인 교단 소속활동과 정기적인 헌금이 거의 없고 배타적인 종교적 소속감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효(孝)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가치규범을 수용하고 제사의례를 실천하면 유교의 구성원으로 인정한다. 유교의 이런 특수성을 감안할 때, 배타적으로 확인되는 종교적 정체성에서는 앞으로도 계속 유교인구가 감소하겠지만, 공동체적 가치관과 문화적 측면에서는 지속적으로 일정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성남은 옛부터 불사이군의 절의정신과 남한산성의 순절의리를 거쳐 한말의병활동에 이르는 불굴의 의리정신의 고장인 동시에, 근기지방(近畿地方)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유교적 이념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청백리의 선비정신의 고향이었다. 또한 걸출한 여성도학자가 출현할 만큼 수준 높은 유교문화를 구현하기도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성남 유교는 그 영향력을 급격하게 상실했으나, 성남시, 성남문화원, 그리고 몇몇 가문들의 협조 가운데 성남의 정체성을 전통적인 유교문화에서 찾아서 복원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다.

〈표1〉성남시의 유교 인구(1995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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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시의 유교 인구(1995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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