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B03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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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복암리 구암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박연네 할머니 출생 | 1936년 - 1936년에 박연네 할머니가 출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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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네 할머니가 천운 마을로 이사하다. | 1960년 - 1960년, 박연네 할머니가 천운 마을로 이사하였다. |
마을지 | 천운 마을 양복점 -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오동리 천운 마을 |
[여자들은 미용실에서 ‘고데’하고 남자들은 양복입고 외출했지]
박연네 씨는, 젊은 시절에 읍내라도 나갈 요량이면 미용실에 들러서 ‘고대’를 했다. 고대는 젓가락처럼 생긴 도구를 불에 가열해서 머리카락을 둥글게 마는 것을 말하는데, 마을 안에 미용실이 두 개나 있어서 천운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인근 시골 마을에서도 머리를 만지러 왔다.
당시에 천운 마을 여자들이 미용실에서 ‘고데’를 하고 외출을 했다면, 남자들은 양복점에서 맞춘 양복을 입고 외출을 했다. 양복점의 주 고객들은 주로 광업소의 사무직 직원들이었지만, 광부들도 양복을 해 입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박연네 씨의 남편도 젊어서는 간혹 양복을 맞춰서 입었지만, 어려운 형편 탓에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많이 해 입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때는 양복점이 두 간디나 있어서 잘 맞춰 입었어. 작업복은 거기에 세탁소가 있어서 다 해주고, 양복은 외출복으로 맞춰 입고. 돈 버니까 짜락짜락 하고 소리 꽤나 내는 사람들은 잘 입고 다녔어. 잘 입고.”
[인근 마을에서 탄광 마을로 채소 팔러 왔지]
천운 마을은 탄광 마을이라 땅이 척박하다. 그래서 채소가 잘 자라지 않는 탓에 마을 사람들은 주로 배추를 비롯한 채소들은 대부분 사다가 먹었다. 시골이지만 도시처럼 부식가게도 잘 되고, 길거리에 좌판을 늘어놓고 채소를 파는 인근 농촌마을 사람들까지 해서 마을 안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댔다고 한다.
“채소 파는 사람들이 도로 위에 다 있었어. 신작로에. 가게도 있었고. 근디 저기 저 욱에 동림동이라고 그런디서 막 채소를 이고 와. 요런 짐치깡[김치재료] 같은 거, 땅이 좋은께 그런디서 해갖고. 그것으로 김치 담그면 엄청 맛있어. 그런디서 아줌마들이 이고 오고 아저씨들이 지고 오고 그럼 번개로[짧은 시간 동안에] 떨어져 부러. 서로 사묵은께.”
채소가 잘 자라지 못하는 땅이라 할 수 없이 인근 마을에서 팔러오는 사람들의 물건을 사서 생활했지만, “밥도 못 먹는 사람이 쌔부렀어[많았어].”라는 박연네 씨의 말처럼, 탄광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알뜰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일을 해서 받은 월급을 한 푼 두 푼 쪼개가며 생활도 해야 하고 자녀교육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모두들 어렵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간간히 부부싸움도 일어나곤 했는데, 바로 마을 안에 있던 술집 때문이었다.
“술집이 너댓개, 거기에 색시들이 있었는디. 그렁께 난리제. 그때는 남편이 광부로 일을 댕기면 월급을 여자들이 찾으러 댕겼어. 저기 원사무실로. 가서 줄을 섰어. 그믄 술집 색시들도 주루룩이 와서 섰어. 술값 받을라고, 그놈 봉투 나오면 그놈 받아 챌라고. 남자들이 찾으면 채갈라고.”
월급을 타는 날이면, 한 달 치 봉급을 술값으로 날려버린 남편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여자들을 보는 것이 일이었다는 박연네 씨. 시대가 흐르고 세태가 변했어도 남편 때문에 속 끓이는 여자는 어디에나 있었나보다.
[없는 사람들이 돈벌러 들어왔어]
화순군 도암면에서 태어난 박연네 씨는, 스무 살 때 이양면으로 시집을 갔다. 남편은 당시 스물세 살이었다. 결혼해서 오년 차 되던 해에 남편이 광업소에 취직이 돼서 이곳 천운 마을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6남매의 자녀를 모두 길러냈다. 남편이 삼교대 하는 대한 석탄 공사 화순 광업소 광부여서 할머니는 다른 일을 하며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시간 맞춰서 밥해줘야 하고 또 새벽일을 가면 세시 반에 일어나서 밥 해주니 고생들 했어. 여자들이.”
광부인 남편을 챙기느라 바깥일을 하지 못해서 힘들고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네 집만 그리 못살았던 것이 아니라, 그때는 누구나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고 강조한다.
“긍께 돈이 없어갖고. 그때는 광업소 들어온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있는 사람들은 안 들어오지. 잘 벌라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돈이 하도 없은께 인자 들어와.”
가난하고 없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돈 벌면 나가버렸던 탄광 마을. 하지만 아직도 이곳 천운 마을과 구암 마을에는 이곳을 고향으로 알고 살아가는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