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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사정에서 싹튼 실학의 씨앗, 누정에서 피어나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20102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지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하윤구 출생 1570년 - 1570년 하윤구, 영신마을에서 출생하다
금사정 건립 1600년경 - 하윤구가 야사마을에 금사정을 건립하다
금사 하윤구 야사 마을 입향 1600년경 - 금사(錦沙) 하윤구(河潤九)[1570-1646]가 1600년경 야사 마을에 입향하다
하윤구 사망 1646년 - 1646년 하윤구 77세에 사망하다
하백원 출생 1781 - 하백원이 출생하다
하백원 사망 1844 - 하백원이 사망하다
김삿갓 시비 1999년 9월
마을지 이서천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화순적벽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화순 동면 중학교 이서 분교장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금사정 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할아버지 당산나무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물염정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창랑정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망미정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마을지 김삿갓 시비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실학의 씨앗, 금사정]

야사 마을 자연 경관 주변에 있는 누정은 예부터 자연 경관을 즐기고 이와 더불어 생활하고자 하는 유생들의 정서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누정은 산 좋고 물 좋은 경관을 배경으로 휴식, 놀이, 강학 등을 위한 기능뿐만 아니라 자연과 함께 하며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였던 정신적 기능도 있었다.

야사 마을의 대표적인 실학자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1781~1844]의 선조 진양 하씨 금사(錦沙) 하윤구(河潤九)[1570~1646]가 1600년경 영평리 영신 마을에서 야사 마을로 처음 입향 한 후 자신의 호를 따 금사정이라는 정자를 설립하여, 이러한 누정의 기능을 실현한 것으로 보인다. 금사 하윤구의 후손인 하성래 씨는 “금사정 앞으로 이서천이 흐르고 뒤로는 산 너머 화순 적벽이 위치하고 있어서 그 아름다움을 더했을 것입니다. 또한 금사공 할아버지께서 영신 마을에서 야사 마을로 들어오셔서 금사정을 짓고 마을 교육을 위해 힘쓰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금사정은 야사 마을이 실학 마을의 중심지가 되기 위한 시초로 여겨진다. 하윤구야사 마을에 거주하며 금사정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평생 지니고 살았던 우국충절의 마음으로 시를 지으며 동복[화순 지역의 옛 지명]의 유생들과 왕래하며 교유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능은 대대로 이어져 실학의 기반을 다졌을 것이다.

최근 후손들은 금사정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야사 마을 실학 정신의 시작을 상징하는 정자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금사정터만 남아 있다. 화순 동면 중학교 이서 분교장 앞의 백아로를 건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는 은행나무 즉, 할아버지당산나무가 있는 자리이다.

[야사 마을 주변의 누정을 찾은 선비들]

야사 마을 주변에는 화순 적벽의 경관에 취해 건립된 누정이 많고 그 안에서 이루어진 문학과 학문의 교류도 활발했다. 청랑리 물염 적벽에 16세기 중엽 물염(勿染) 송정순(宋庭筍)[1521~1584]이 지은 물염정(勿染亭), 청랑리 창랑 적벽에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 이후에 창랑(滄浪) 정암수(丁巖壽)가 지은 창랑정(滄浪亭)[현재는 터만 남아 있음], 장항리 노루목 적벽에는 인조가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에 분개한 적송(赤松) 정지준(丁之寯)이 1646년에 건립한 망미정(望美亭)이 있다.

물염정김인후, 이식, 권필 등 조선 선비들이 지은 시문이 붙어 있어 문인들이 많이 찾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물염정김삿갓이 즐겨 찾던 곳이기도 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화순군은 물염정 앞에 1999년 9월 김삿갓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김삿갓으로 유명한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1841년 처음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땅을 밟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화순 적벽의 절경에 취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를 흐르는구나[無等山高松下在 赤壁江深沙上流]”라고 시 한수를 지었다.

그리고 김문곡과 더불어 적벽강에서 서로 화답하는 시가 전하여, 이곳의 유생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태평스런 오늘날 성군의 시절에/ 대는 어찌하여 동복까지 왔느뇨/ 세상살이 돛처럼 흔들려도 한 되지 않으니/소동파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올랐다네” [적송 정지준이 적벽을 찾은 김문곡에게 먼저 읊은 시]

“산 높고 물 맑은 적벽의 가을/ 동복 고을 어찌하여 옛 황주와 같은지/ 시객들 강 건너는 학을 따르지 못하는데/ 학은 날아 시월 배타고 저 언덕에 이르네”[문곡 김수항정지준의 시에 붙여 읊은 시]

[정보제공]

  • •  정규철(남, 1942년생, 향토사학자)
  • •  하성래(남, 1935년생, 규남 하백원 선생 후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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