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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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律成 |
이칭/별칭 | 정부은(鄭富恩)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한규무 |
출생 시기/일시 | 1914년 7월 7일(음) - 정율성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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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2년 - 정율성 능주 공립 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4년 - 정율성 광주 숭일 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정율성 광주 숭일 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정율성 중국 망명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정율성 의열단 가입 |
수학 시기/일시 | 1933년 - 정율성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38년 - 정율성 루쉰 예술 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정율성 중국 공산당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정율성 조선 혁명군 정학교 음악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정율성 조선 인민군 구락부장 겸 조선 인민군 협주단 단장 역임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정율성 조선 음악 대학 작곡부장 역임 |
몰년 시기/일시 | 1976년 12월 7일 - 정율성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10월 4일 - 정율성 흉상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7월 15일 - 정율성 흉상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정율성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 |
추모 시기/일시 | 2011년 2월 - 정율성 기념 사업회 설립 |
출생지 | 정율성 출생지 - 광주광역시 |
거주|이주지 | 정율성 거주지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
거주|이주지 | 정율성 거주지 - 광주 양림동 |
학교|수학지 | 광주 숭일학교 - 전남 광주 |
학교|수학지 | 전주 신흥학교 - 전북 전주 |
활동지 | 정율성 활동지 - 중국 난징|상하이|옌안|베이징 |
묘소 | 중국 베이징 팔보산 혁명묘역 |
성격 | 독립운동가|음악가 |
성별 | 남자 |
본관 | 하동(河東) |
대표 경력 | 조선 혁명 군정 학교 음악장|조선 인민군 구락부장 겸 조선 인민군 협주단장|조선 음악 대학 작곡부장|「조선 의용군 행진곡」·「팔로군 행진곡」 작곡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
[가계]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 부은(富恩). 아버지는 정해업(鄭海業)이고 어머니는 최영온(崔英溫)이며 부인은 딩쉐송[丁雪松], 외동딸은 정샤오티[鄭小提]이다.
[활동 사항]
정율성(鄭律成)[1914~1976]은 부친을 따라 1917년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능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다시 광주로 이주하면서 숭일 소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33년 의열단 호남 지역 모집책인 셋째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난징[南京]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정율성은 1933년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 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난징과 상하이[上海]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상하이에서 레닌그라드 음악 대학 출신의 소련 작곡가 크리노와(Krenowa) 교수를 만나 성악·작곡·피아노·바이올린 등을 배우고 ‘율성(律成)’으로 개명하였다.
1937년 정율성은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였고, 1938년 루쉰[魯迅] 예술 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9년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하였다. 이 무렵 그는 루쉰 예술학원 성악학부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딩쉐송[丁雪松]을 만나 결혼하였다. 1942년에는 옌안을 떠나 조선 혁명군 정학교에서 음악장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유격전가」·「처녀 적녀성」·「조선 의용군 행진곡」·「연안송」·「팔로군 행진곡」 등 항일성이 짙은 노래를 작곡하여 명성을 얻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그는 북한으로 건너가 1947년 조선 인민군 구락부장 겸 조선 인민군 협주단장, 1949년 조선 음악 대학 작곡 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조선 인민군 행진곡」도 작곡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중국으로 소환되어 중국 국적을 얻고 베이징의 인민 예술 극원·중앙 가무단·중앙 악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연 및 창작 활동에 제약을 받는 등 고초를 겪다가 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근교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1988년 그가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 ‘중국 인민 해방군가’로 지정되면서 복권되었으며 중국인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저술 및 작품]
「조선 의용군 행진곡」, 「팔로군 행진곡」[중국 인민 해방 군가] 등이 있다.
[묘소]
중국 베이징 팔보산 혁명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2009년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