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1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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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世鐘 |
이칭/별칭 | 이공(李空) |
분야 |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최성은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 이세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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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42년 - 이세종 사망 |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187번지 |
활동지 | 도암면 등광리 일원 |
성격 | 개신교인 |
성별 | 남 |
[정의]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출신의 기독교인.
[개설]
‘도암의 성자’라고 불리는 이세종은 조선조 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1920년경 성경을 처음 읽은 후 진리임을 깨닫고 성경대로 실천하면서 금욕, 금육, 절제된 삶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며 살다가 신사참배를 피해 1939년 화학산에 은거하여 산막에서 살다가 1942년에 죽었다.
[활동 사항]
이세종(李世鐘)[1879~1942]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어깨너머 동냥글로 한글을 깨우쳐 읽고 쓰는 것을 배웠다. 그는 새경[머슴살이로 받는 몫]으로 겨우 식구들을 먹여 살리며, 논마지기를 장만해서 형을 장가들게 해주었다. 머슴살이를 하면서 자신의 집과 땅을 마련 했을 때 그는 이미 40이 넘은 노총각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난한 집안의 어린 처녀 하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장가든 후에도 그 부지런함과 성실함에는 변함이 없어 남부럽지 않은 살림을 이루었는데 수 십 마지기의 논밭을 스스로 장만하였다.
어느 해 도암면에 심한 가뭄과 흉년이 들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자 자신의 곡간을 열어 면민들의 구황에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간 자기에게 빚진 이들을 모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문서를 불태우고 탕감해 주었다. 그의 덕행에 너무 감동한 채무자들과 주민들이 감사의 뜻으로 자진하여 송덕비를 세웠다. 그러나 너무나 겸손한 사람이라 굳이 사양하고 그 송덕비를 땅속에 묻어버렸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지만 자식을 갖지 못함에 대한 시름에서 헤어날 수가 없던 어느 날 한 친지의 집에서 우연히 성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성경을 빌려다가 집에서 틈나는데로 읽기 시작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참지혜를 배우고자 한 사람 두 사람씩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믿음과 끈기가 뛰어난 이현필이 이세종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 토착 수도원인 동광원을 창설했다. 1942년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 주었다.
[묘소]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대천리 화학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12년 생가 복원과 순례길을 추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