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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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下絶景和順赤壁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보산리|창랑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규철 |
[적벽의 자연환경]
화순 적벽은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보산리·창랑리 일대 창량천 주위에 약 7㎞에 걸쳐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경승지이다. 화순 적벽은 무등산 국립 공원이 품고 있는 제일의 비경으로 예로부터 호남 제1의 명승지로 알려져 왔다. 무등산은 행정 구역상 광주광역시와 화순군·담양군에 걸쳐 있는 남도의 진산(鎭山)이다. 2013년에 국립 공원으로 승격되었고, 총 면적 75.4㎢ 중 화순군의 면적은 15.8㎢으로 약 20.9%를 차지하고 있다.
선조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낸바 있는 임훈(林薰)[1500~1584]은 고을의 선비들과 1574년(선조 7) 4월 20일에 떠나서 25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적벽을 유람한 바 있다. 70세를 넘긴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천하제일의 명승을 탐승하려는 열망으로 무등산을 넘었다. 동행한 고경명(高敬命)[1533~1592]은 「유서석록(遊瑞石錄)」이라는 기행문을 남겼으며 당시 날짜별로 들렀던 곳을 기록하였다.
한반도의 13정맥의 하나인 호남 정맥 중심에 무등산이 있고 백마 능선을 타고 내려가다 보면 별뫼[星山]가 불끈 솟아 있으며 산의 끝자락은 적벽강에 담그고 있다. 해발 1,187m의 무등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 크고 작은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백운산이 아득히 멀리 보인다. 그 사이에 화순군 동복면에 위치한 옹성산(瓮城山)[573m]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산 아래에 위치한 동복호는 파란 하늘처럼 맑고 푸르다. ‘옹성’이라는 이름은 거대한 암봉들이 하나 같이 옹기 항아리 형태를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그 중 쌍바위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동복댐을 이루는 동복천 수계는 별산·안양산(安養山)·무등산(無等山)·연산(連山)·차일봉(遮日峰)·백아산(白鵝山)·옹성산의 산열을 유역 분수계로 삼고 있다. 위의 수계에서 발원한 지류들이 이서면 창랑리와 도석에서 만나 적벽으로 흘러든다. 수원지는 동복천 하류 달내[達川]에 건설되었으며 높이 44.7m, 길이 188.1m로 1985년에 완공되었고 담수 능력은 9,200만 톤이다. 이 공사로 말미암아 이서면 서리(西里)·장학(障鶴)·창랑(滄浪)·물염(勿染) 등 10여 개 마을이 수몰되었다.
댐 상류 4㎞ 지점에 화순 적벽이 위치하고 수면이 약 14m 정도 올라와 있다. 높이가 약 100m에 이르며 약 400m 길이의 퇴적암층으로 형성되어 있다. 강폭은 약 70m이고 상류 7㎞에 이르는 물가에 퇴적암의 일종인 점판암이 마치 병풍처럼 형형색색으로 펼쳐져 빼어난 경관을 이룬다. 화순 적벽은 전라남도 기념물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적벽의 유래]
‘적벽’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동복에 유배된 최산두(崔山斗)[1483~1537]가 처음 사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최산두는 동복 지역에서 1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는데 어느 날 동복천을 거슬러 오르다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밑으로 파란물이 흐르는 선경을 발견하였고 창랑을 거쳐 물염(勿染)에 이르게 된다. ‘물염’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세계를 말한다. 최산두의 『신재집(新齋集)』에는 이때 쓴 시가 전한다. “백로 고기 엿는 모습 강물이 백옥을 품은 듯하고, 노란 꾀꼬리 나비 쫓는 모양은 산이 황금을 토함 같네.”
중국의 후베이[湖北] 지역에는 ‘적벽(赤壁)’이라 불리는 네 곳이 있다. 하나는 양쯔강 변에 있는데 이곳이 삼국 시대 주유(周兪)가 조조(曹操)를 대파한 적벽 대전의 장소이며, 나머지는 무창(武昌)과 한양(漢陽), 그리고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라는 유명한 글을 남긴 황강(黃岡)이다. 화순 지역의 적벽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이다. 『화순 군지』에서는 노루목 적벽·보산 적벽·창랑 적벽·물염 적벽으로 분류해 놓았으나 화순 적벽이라고 하면 보통 노루목 적벽을 일컬어 왔다.
정지준(丁之雋)[1592~1663]은 정암수(丁巖壽)[1534~1594]의 손자로 창원 정씨이다. 정지준의 선조는 정인예(丁仁禮)로 조선 건국 초 벼슬을 버리고 돌연 낙향하여 백아면 남치·노기 일원에 세거지를 마련하고 백아산에서 발원한 쪽빛 여울[藍川]가에 월영정(月迎亭)을 짓고 은거하였다. 월영정은 무등산 원효 계곡에 최초로 건립된 독수정(獨守亭)과 때를 같이 한다. 월영정 이후 남천과 만덕산에서 발원한 대덕천(大德川)이 만나는 지점에 물염정(勿染亭)이 들어섰다. 물염정은 동복 현감을 지낸 송구(宋駒)[1483~1550]가 퇴휴하면서 지은 것이다. 정자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송정순(宋庭筍)[1521~1584]이 아호(雅號)를 ‘물염’으로 사용하였다. 지류를 따라 내려 가다보면 백아산과 옹성산 수계가 만나는 곳이 창랑(滄浪)이다. 마을 어귀에 창랑정(滄浪亭)[1589]이 있었는데 선조 때 사람인 정암수의 정자이다.
[문화 공간으로서의 적벽]
적벽을 문화 공간으로 일군 사람은 조선 인조 때의 정지준이다. 1636년(인조 14)[병자년]에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급박해지자 임금이 조칙(詔勅)을 내렸는데 정지준은 이를 받들어 의병을 발의하여 남한산성으로 갔다. 당시 옥과 현감 이흥발(李興渤), 순창 현감 최온(崔薀), 한림(翰林) 양만용(梁曼容)과 동지 김종지(金宗智)·하윤구(河潤九), 진사 정호민(丁好敏) 등이 뜻을 같이 하여 정예 106명을 이끌고 갔으나 성하지맹(城下之盟)의 소식이 전해지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돌아와 적벽에 숨었다.
1646년(인조 23) 무이구곡(武夷九曲)의 뜻을 취해 창랑과 적벽 사이 강가에 정자를 짓고 망미정(望美亭)이라 하였다. 소동파가 지은 「적벽부(赤壁賦)」의 “묘묘혜여회 망미인혜천일방(渺渺兮余懷 望美人兮天一方)[넓고 아득한 나의 마음이여 하늘 저 끝에 있는 임을 그리도다]”에서 취한 것이다. 망미정에는 청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 세자, 봉림 대군, 그리고 삼학사(三學士)에 대한 애틋함과 우국충정이 담겨 있다. 정지준은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동쪽 벽에는 노중연(魯仲連)이 바다를 건너고, 남에는 문천상(文天祥)이 하늘을 쳐들며, 서에는 형가(荊軻)의 소매 속을 더듬고, 북에는 도정절(陶靖節)이 취해서 누워 있는 그림을 그리게 했다. 또한 정지준은 적송자(赤松子)라 자호(自號)하였는데 소나무의 절개를 사랑하여 옛 신선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최산두와 문인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적벽에 대한 시를 짓고, 고을 현감 임억령(林億齡)[1496~1568]은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 명하였다. 조선 초기 월영정이 세워진 이래 물염정·창랑정·망미정은 독수정·환벽당·식영정·송강정과 함께 계산 풍류의 양대 흐름을 형성하면서 조선 후기 문학의 산실이 되어 당대 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1731~1783]은 나주 목사(羅州牧使)인 아버지를 따라와 물염정 구경에 나섰다가 뜻밖에 실학의 대가인 나경적(羅景績)[1690~1762]을 만났으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화순 현감을 지낸 정재원(丁載遠)[1730~1792]의 아들로 물염정에서 시를 읊은 바 있다. 바로 『다산 시문집』에 실려 있는 「유적벽정자(遊赤壁亭子)」이다.
역역추사세경분(歷歷秋沙細逕分)[해맑은 가을 모래 오솔길이 뻗었는데]
동문청취욕생운(洞門靑翠欲生雲)[동문의 푸른산은 구름이 피어날 듯]
계담효침연지색(溪潭曉浸臙脂色)[새벽녘 시냇물엔 연지빛이 잠기었고]
석벽청요금수문(石壁晴搖錦繡文)[깨끗한 돌벼랑은 비단무늬 흔들린다]
자사연유수득취(刺史燕游誰得趣)[수령의 한가한 놀이 누가 흥취 즐기나]
야인경조자성군(野人耕釣自成群)[시골 사람 무리 지어 밭 갈고 낚시하네]
독련산수안고벽(獨憐山水安孤僻)[사랑홉다 고운 산수 외진 곳에 자리잡아]
부방명성여세문(不放名聲與世聞)[명성 흘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다오]
운계루굴절(雲溪屢屈折)[구름 시내 여러 번 꺾어진 끝에]
요조견고정(窈窕見孤亭)[아련히 외론 정자 눈에 들어와]
적석류하기(赤石流霞氣)[붉은 돌 노을 기운 어리어 있고]
청촌낙조령(靑村落鳥翎)[푸른 숲엔 새들이 날아 내리네]
괘의풍함창(掛衣風檻敞)[옷을 건 바람 난간 훤히 트였고]
계람수화형(繫纜水花馨)[뱃줄 맨 곳 물풀 꽃 향기롭기만]
시간귀시로(試看歸時路)[돌아가는 길목에 눈 들어보니]
봉두이수성(峯頭已數星)[산봉우리 저 위에 별이 하나 둘]
정비석은 소설 『방랑시인 김삿갓』에서 적벽강의 황혼을 장엄하게 묘사했다. 김병연(金炳淵)[1807~1863]이 이승의 마지막 밤을 보낸 동복 민가에서 발견된 「무등산」이라는 제목의 시는 그 경지가 대단히 높아 보인다. “서석산고송하재(瑞石山高松下在) 적벽강심사상류(赤壁江深沙上流)”가 그것이다. 창랑정 주인 정암수는 진사로 성산 가단(星山歌壇)과 교유하였는데 특히 송강 정철 및 고경명과 가까웠다. 송강은 시를 지어 창랑정에 걸었으며 고경명은 ‘창랑의 여섯 경치[凔浪六詠]’를 노래하였는데 『창랑 유집(滄浪遺集)』에 전해진다.
망미정 주인 정지준은 별뫼 끝자락인 학봉 중턱에 환학정을 짓고 망미정을 오가며 소요하였다. 「환학정(喚鶴亭) 뜨락에 난초를 심고서 느낌을 읊음」은 그의 절창이다. “옛날 공부자 난의 지조를 노래하였다 하였으니 깊은 골 나의 난은 누구를 위한 지조로 있는가. 향기 그윽하나 멀리 뜻 두는 데로 가지 못하니 한 줄기 난 잎에 숨어사는 마음 시름이 느는구나”
『동복 읍지』에 실린 적벽 팔경은 송강 정철의 「관동 팔경(關東八景)」이 그러하듯이 정지준의 사생 시각이 포착한 것이다.
강선명월(降仙明月)[강선대 명월]
환학청풍(喚鶴淸風)[환학 하늘바람]
금사어화(金沙漁火)[금사 여울 고기떼]
한암효종(寒庵曉鐘)[한산사 새벽 종소리]
한산폭포(寒山瀑布)[한산사의 폭포]
화표귀운(華表歸雲)[화표봉 구름]
고소락조(姑蘇落照)[고소대 낙조]
황니설경(黃泥雪景)[학탄 설경]
팔경 시는 세종 때 안평 대군이 만든 「비해당 소상팔경 시첩(匪懈堂瀟湘八景詩帖)」 이후 조선의 문인들이 즐겨 사용한 시제이다. 정지준은 때때로 고을원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풀고 관덕대에 나가 활시위를 당겼다. 1641년(인조 19) 4월에는 적벽강 건너 강선대에서 동복 현감 이형(李逈)[1603~1655]을 초청해 잔치를 베풀고 3일 동안 향사례(鄕射禮)를 시행하고 가무로 흥을 돋았다.
[지역 주민들의 휴식 공간]
화순 적벽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 잡았고 이곳에서 지역의 놀이 문화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강물에 배를 띄워 선유를 즐겼고, 정자에서는 적벽 시사(赤壁詩社) 동인(同人)들의 시회가 열렸다. 부처님오신날에는 농민들이 사물놀이로 고단한 심신을 달랬고 절벽 위 낙화대에서는 풀섶에 불을 붙여 강으로 날리는 낙화 놀이가 장관을 이루었다. 인근 지역인 동복·백아면·담양 일대에서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축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되고, 강변 잔디밭이나 모래사장에 차일(遮日)을 치고 마을 단위로 모여 화전을 부치거나 물고기를 잡아 어죽을 끓이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때에는 백아산 공비 토벌 작전 지역이 되어 민가가 불타는 가운데 월영정·물염정·창랑정도 수난을 겪었다. 전후(戰後) 지역 유지들이 합심하여 물염정은 복구되었으나 월영정·창랑정은 사라졌다. 1985년 동복댐 확장 공사 이후 적벽은 상수원 보호 구역이 되어 접근이 어려웠지만 화순 적벽의 옛 정취는 그대로 남아 있다. 30여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화순 적벽은 2014년 10월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