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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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奎峰庵-無等山-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오종주 |
[개설]
규봉(奎峰)은 무등산 정상인 천왕봉에서 동남쪽으로 300m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 1,100m에 이른다. 규봉암(奎峰庵)은 규봉에서부터 남동쪽에 이르는 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상부에서 약 900m, 규봉에서 약 600m에 이른다. 규봉은 1872년 「채색 지도」에도 무등산 정상부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로 표시되어 있다. 규봉암은 행정 구역으로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규봉암을 말하지 않고서는 무등산을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무등산의 또 다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규봉암의 역사와 위치]
규봉암에 대한 기록은 신라 시대에 의상 대사가 서석과 규봉을 보고 정사(精舍)를 세웠다고 한 것이 최초이다. 조선 초기 문신 권극화는 “광산(光山)의 진산을 무등산 혹은 서석산이라고 하는데, 그 형세가 웅장하여 모든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규암(圭庵)이라 하고 그 곁에 서석(瑞石)이 겹겹이 서 있는데 [중략] 옛날 의상 대사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정사(精舍)를 세웠고, 계속하여 보조와 진각이 공부하여 도를 얻어 그 꽃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삼존석(三尊石)과 십이대(十二臺)를 보면 대개 이를 생각할 수가 있다.” 라고 하면서 무등산에 대한 아름다움과 규봉암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이후 제대로 절의 모습을 갖추어 창건하기는 798년(신라 원성왕 14)에 당에서 귀국한 순응 대사였다고 전하고 있다.
권극화가 언급한 규봉암은 암자와 함께 있는 서석(瑞石)을 통틀어 이야기 하고 있다. 규봉에 있는 암자는 세월의 풍파 속에서 창건되고, 폐사되었다가 재건되고,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지만, 규봉암의 서석은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규봉 일대의 서석은 입석대, 서석대로 대표되는 무등산의 주상 절리 지형이다. 무등산의 주상 절리 지형은 암괴가 크고 장엄하며, 암괴가 층층이 단을 이루어 마치 병풍과 같은 모습을 갖는다. 그 중에 규봉암은 다양한 주상 절리대가 주변의 식생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계절마다 그 색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규봉은 행정 구역상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에 있으며, 높이 약 1,100m이다. 규봉은 무등산 정상부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진 능선부의 중간에 위치한 규봉암은 규봉의 남동쪽 약 600m에 있고, 높이 약 850m이다. 일반적으로 불리는 규봉암 일대에 있는 층층의 암괴를 규봉으로 불리운다.
[무등산 주상 절리대의 생성과 특징]
무등산 주상 절리대의 특징은 정상부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발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5~6각의 형태를 가지며, 수정 기둥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암괴의 크기는 위치마다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입석대, 서석대 일대의 암괴가 1~2m 내외 두께에 수m의 크기를 갖지만, 규봉암 일대의 암괴는 5~7m의 두께로 수m의 암괴가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주상 절리는 현무암질에서 나타나지만, 무등산의 주상 절리는 생성 원인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규봉암 일대 주상 절리 지형의 특징은 첫째 기존 주상 절리 지형과는 다른 암질을 가지고 있다. 규봉암의 암질은 무등산 석영 안산질 응회암으로 매우 뜨거운 화산재들이 수백m 두께로 쌓여 있다가 암석과 같이 굳어지고, 이후 치밀한 안산암질로 재결정된 암질이다. 이 응회암은 약 8300만 년 전에 분출된 이후 천천히 식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른 지역이 급속하게 식혀져 암괴의 크기가 수십㎝인 것이 주를 이루는 반면에 규봉암의 경우에는 수m~수십m에 해당하는 암괴가 나타나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
규봉암의 경우에 높이 960m 높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암괴 지역의 폭이 130m, 기둥의 높이가 20~30여m, 경사 각도는 80~90°를 유지하고 있다. 규봉암 암괴의 형태는 5~6각형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한 면의 길이는 1.5~2.2m 사이이고, 직경은 3m, 암괴 기둥의 높이는 2~10m로 다양하나 주로 7~8m를 유지하고 있다. 이는 암괴의 크기의 차이는 암질에 따른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특징은 주상 절리대의 생성 과정이나 성인이 다르다. 제주도는 파랑의 해식 작용에 의하여 현재의 해안에 드러난 주상 절리로 성인이나 생성 과정이 비교적 간단하다. 그에 비하면 무등산의 규봉암은 수천만 년 전에 이루어진 후 다양한 지구의 기후 환경 변화 과정을 겪으면서 독특한 생성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 지형이다. 무등산의 규봉암의 암질이 무등산 안산암질 응회암이라는 것은 화산 활동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주상 절리의 지형적인 특징은 기나긴 지질 시대에서 최근에 어떤 기후 환경에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규봉암도 신생대 4기에 동안에 동결 융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무등산의 규봉암의 주상 절리는 동결과 융해가 반복되면서 기둥 모양의 암괴들이 떨어져 나와 토양 속에 묻히어 경사면을 따라 이동하였다. 이에 따라 암괴가 떨어져 나가는 현상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주상 절리대는 점차 후퇴하였고 현재의 위치에서 남아 있게 되었다.
[규봉암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
무등산의 생성 과정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규봉암 경관의 아름다움이다. 과거 많은 선인들은 규봉암 일대의 경관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대표적인 시로는 김창흡과 기대승의 시가 있다. 이들은 규봉암의 주상 절리를 “무수한 기이한 봉우리” 또는 “암석의 기이함”으로 표현하고 있다.
광석대(廣石臺)[광석대에서][김창흡]
무수기봉렬(無數奇峯列)[무수한 기이한 봉우리 열 지어 있어]
회간유차대(回看有此臺)[고개 돌리니 바로 광석대로구나]
식피사적의(息疲斯適矣)[피로 풀기에 적당하고]
연상경유재(延賞更悠哉)[구경하기 또한 문득 유유하네]
후세단제단(後勢丹梯斷)[붉은 계단 끊어진 뒤 기세와]
전도적벽개(前途赤壁開)[붉은 벼랑 열린 앞 길이라]
관기선적근(觀棊禪跡近)[바둑 두는 신선의 자취 가까이서 본 듯하여]
부좌욕망회(趺坐欲忘迴)[가부좌하고 않아 돌아갈 마음 잊었네]
도선관기처거차불원(道詵觀棊處距此不遠)[도선 국사가 보았다는 바둑 둔 곳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삼연집 습유(三淵集拾遺)』 권10]
도규봉(到圭峯)[규봉에 이르다][기대승]
하음탁동운(河陰擢同雲)[하음에는 동운이 빼어나고]
사상치일관(泗上峙日觀)[사상엔 일관이 우뚝했네]
최줄배고민(崔崒排高旻)[드높아 하늘에 꽂히고]
등척대은한(騰擲帶銀漢)[날듯 은하수 닿았네]
안지암석기(安知巖石奇)[어찌 알까 암석의 기이함]
역수동해반(亦秀東海畔)[동해 가에도 빼어남을]
리력절반공(峛屴截半空)[까마득히 반공에 횡단하고]
표묘운우단(縹緲雲雨斷)[가물가물 운우도 끊기도다]
평생모원유(平生慕遠遊)[평생에 먼 유람 생각하며]
저립발호탄(竚立發浩歎)[우두커니 서서 탄식을 했노라]
선심고정징(禪心古井澄)[선의 마음은 옛 우물이 맑고]
세려춘빙반(世慮春氷泮)[세상 생각은 봄 얼음이 풀리네]
분애방미활(氛埃方未豁)[흐린 기운 아직 열리지 않았으니]
욕대동방단(欲待東方旦)[동방이 밝아짐 기다리련다]
강응망하궁(剛凝莾何窮)[강하게 응고됨 망망하여 알 수 없지만]
차리기일관(此理期一貫)[이 이치 기필코 관통하리라]
랑곽무진경(朗廓無塵境)[명랑하여 티끌 없는 지경이고]
청고불주천(淸高不住天)[청고하니 부주(不住)의 하늘이로세]
유화의석하(幽花欹石罅)[그윽한 꽃 돌틈에 쓰러지고]
고목의암변(古木倚巖邊)[고목나무 바위 가에 기대었네]
일전남명활(日轉南溟活)[해는 도니 남명이 널찍하고]
운이북두현(雲移北斗懸)[구름 옮기니 북두가 매달렸네]
래유궁승상(來遊窮勝賞)[놀러와서 좋은 경관 모두 완상하니]
혼각협비선(渾覺挾飛仙)[문득 나는 신선 낀 듯하여라]
서석명산치해연(瑞石名山峙海堧)[서석의 명산 바닷가에 솟았으니]
봉영풍일정의연(蓬瀛風日正依然)[봉래산 영주산 바람과 햇볕 참으로 비슷하여라]
군선경막간청수(羣仙更莫慳淸邃)[뭇 산은 맑고 깊음 아끼지 마라]
아역금래최상전(我亦今來最上巓)[나도 이제 가장 높은 곳에 왔노라.][『고봉 선생 문집』 권1]
규봉사(圭峯寺)[규봉사에서][김극기]
궤상고난명(詭狀苦難名)[괴상한 모양 무엇이라 이름하기 어려운데]
등림만상평(登臨萬象平)[올라와 보니 세상이 눈 아래에 있네]
석형재금출(石形裁錦出)[돌 모양은 비단을 잘라 만든 것 같고]
봉세탁규성(峯勢琢圭成)[산 형세는 옥을 깎아 이룬 것 같네]
승천병진적(勝踐屛塵迹)[좋은 곳에 오니 세속의 더러움 끊었고]
유서첨도정(幽棲添道情)[그윽이 사니 도정이 더하네]
하당포차망(何當抛此網)[어찌 세상 일 버리고]
부좌학무생(趺坐學無生)[부좌하여 무생불법을 배우지 않으리.][『동국여지승람』 권40]
고경명(高敬命)은 1574년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무등산과 주변 지역을 답사한 기록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통해 규봉암, 광석대, 문수암, 은신대 등을 유람한 기록을 남겼다. 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금석사를 지나서 산허리를 감돌아 동쪽으로 나오니 이곳이 규봉으로 김극기의 시에 이른바 ‘바윗돌은 비단을 마름질하여 장식하였고, 봉우리는 백옥을 다듬어 이루었네[石形裁錦出峯勢 琢圭成]’ 라 한 것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 암석의 기묘하고도 오래된 품이 입석과 견줄 만하다고 할 수 있으나 폭이 넓고 크며 형상이 진기하고도 훌륭한 점에서는 입석이 이에 따를 수가 없다. 규봉의 경치는 권극화(權克和)의 기록이나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생략한다. 그런데 예로부터 전하기를 해동의 서성(書聖)이라 하는 신라 성덕왕 때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규봉암(圭峯庵)’이라는 삼대문자(三大文字)의 액자가 있었으나 훗날 어떤 자가 절취해 가버렸다고 한다.
광석대(廣石臺)
광석대가 있는 곳은 규봉암의 서쪽으로 그 석면(石面)이 깎은 듯 넓고 평탄한 것이 격에 맞고 수십 명이 둘러앉을 만하다. 당초에는 서남쪽이 조금 낮았으나 절의 중이 사람들을 모아 큰 돌을 괴었다고 하는데, 그 엄청나게 큰 바위를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그렇게 하였는지 감탄할 뿐이다. 이른바 삼존석(三尊石)이라 한 것이 광석대의 남쪽에 있는데 그 꼭대기가 숲 위에 창연히 솟아 있어서 바위가 더욱 웅장하게 보여 그 기세를 돕는 것 같다. 또 열 아름이나 되는 노송이 하늘을 가려 비스듬히 광석대 위에 걸쳐 뒤덮고 있으니 그 잎은 푸르고, 그늘은 짙어 시원한 바람이 저절로 일어나 한더위에도 홑것을 입고는 오래 앉아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천관산, 팔령산, 조계산, 모후산의 여러 봉우리가 모두 눈 아래 내려다 보인다. 무릇 규봉암의 빼어남이 서석[무등산]에 있는 모든 암자 가운데 으뜸이라면 이 광석대 또한 규봉 10대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니 남쪽에서 제일경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다만 최치원 선생 같은 분의 행차를 얻어 훌륭한 시를 읊어 규봉 위에서 한번 취한 붓을 휘둘러 아름다운 휘호를 남길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운 감회가 없지 않다. 마치 진주의 쌍계사나 합천의 해인사에 최 선생이 시를 남긴 것처럼.
문수암(文殊庵)
광석대의 서쪽 길에는 문지방 같은 돌이 가로질러 있는데 이 돌을 넘어들면 문수암이다. 암자 동쪽 기슭에 오목하게 패인 돌이 있어 그 중앙에서 샘이 솟아나오며 돌 틈에는 석창포가 수북이 피어 있고 그 앞에는 높이가 넓이가 수십 척 되는 바위가 있다. 풍혈대(風穴臺), 장추대(藏秋臺), 광석대에서 서북쪽으로 돌층계를 따라 몇 발자국을 돌면 자월암(慈月庵)이다. 이 암자의 동편에는 풍혈대가 있는데, 돌 밑에 있는 구멍으로 풀잎을 뜯어 넣어보니 조금 펄럭이는 기미가 있다. 이 암자의 서쪽에는 병풍 같은 입석이 있으며 노송이 그 위에 우거져 있으니 여기가 바로 장추대인데 깊은 골짜기를 굽어보면 머리끝이 쭈뼛할 정도로 아스라하다. 장추대에서 서쪽으로 가서 낭떠러지를 따라 남쪽으로 잡아 돌면 오솔길로 나서는데 그 넓이가 한 자도 못된다. 좁은 길에는 패인 곳을 돌로 덮은 데가 더러 있어서 밟으면 덜거덕 하는 소리가 나고 내려다보면 아득한 절벽으로 조심스럽게 돌을 밟고 가는데 걸음을 멈추면 다리가 떨려 발꿈치를 붙이고 설 수가 없다. 낭떠러지가 다하면 움푹 패인 데가 나서는데 마치 원숭이처럼 기어올라야만 한다.
은신대(隱身臺)
장추대 남쪽이 곧 은신대인데 여기에는 누운 다복솔[矮松] 너댓 그루와 철쭉 몇 무더기가 모두 드러누운 듯 자라고 있다. 은신대의 서쪽에 있는 돌은 바둑판같이 네모반듯한데 전하는 말로는 옛날 도선 국사가 좌선하던 곳이라 한다. 그 북쪽에 있는 청학(靑鶴), 법화대(法華臺) 등은 바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모두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한식경 뒤에 벌벌 떨며 다시 손으로 땅을 짚고 팽조(彭祖)가 샘을 굽어보는 형상으로 조심조심하며 내려와 선생을 모시고 문수암에서 묵었다.”
[무등산에서 가장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규봉암]
선인들이 무등산에서 규봉암 일대를 최고의 경관 지역으로 보는 이유는 주상 절리 자체의 경이로움이라고 할 것이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 큰 암괴와 수정의 6각 기둥 같이 반듯한 암석이 포개어져 있어 이는 하늘에 닿았다고 한다. 이러한 형상은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도 각별하고, 기개의 상징으로 남았을 것이다. 규봉암 일대의 대표적인 지형 경관은 단연 주상 절리이다. 규봉암 일대의 송하대, 광석대, 풍혈대, 장추대, 창학대, 송광대, 능엄대, 법화대, 설법대, 은신대 등의 이 주상 절리는 일정한 형태를 보이지만, 각각이 다른 모양으로 어우러져 있다.
이들 주상 절리대는 수직으로 긴 바위가 층층이 얹혀 있으며, 마치 긴 탑과 같은 형상을 가진다. 하나하나가 봉우리와 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는 듯한 기묘한 바위들이 규봉암을 에워싸고 있고, 주변의 노송들과 어울림이 매우 아름답다. 입석대나 서석대가 바위 자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 하지만, 규봉암은 바위 자체도 입석대 보다 아름답지만, 여기에 주변과 어우러지는 풍경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이라 하겠다. 규봉암 일대의 바위는 무등산 그 어느 지역보다 크기가 크다. 입석대의 바위가 한 변의 폭이 1.5m 내외를 보이지만, 규봉암의 바위는 한 변의 폭이 3m를 넘는 것들이 허다하고, 높이는 입석대의 두 배에 해당된다. 규봉암 아래에 넘어져 있는 바위는 길이가 약 15m를 보이고 있어, 그 규모에 놀라게 된다. 이러한 바위가 하나의 단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3개의 단 이상으로 층층이 쌓여져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무등산을 등반하면서 규봉암에 도달하면, 주변 풍경에 발길을 멈추게 되고, 절이 가지는 포근함에 머무르게 된다. 하나하나의 주상 절리들을 돌아보고, 화순 이서의 전경을 바라보게 되고, 안양산과 낙타 능선을 볼 수 있는 풍경 또한 감탄이 절로 나오는 지역이 규봉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