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301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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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羅와 百濟- - 境界, -山- 傳- - |
영어공식명칭 | The Story of Ahop-Mountain, The Border between Silla and Baekje |
이칭/별칭 | 건흥산,구산,거열산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거창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신승열 |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삼국 시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 아홉산에 전해 오는 이야기.
[개설]
거창은 1,400년 전 삼국 시대의 접경 지역이었다. 거창의 한복판에 자리한 아홉산은 신라와 백제의 경계선이었다. 수많은 전쟁 속에서 아홉산은 신라가 되었다가 백제의 영토가 되기도 하는 격랑 속에 있었다. 아홉산은 신라와 백제의 전장터가 되기도 했고 사신을 배웅하고 주민들이 넘나들며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소통의 공간이기도 했다. 아홉산은 건흥산, 거열산, 구산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아홉 개의 봉우리, 아홉 골짜기마다 이름과 이야기들이 전해져 왔다.
높은 산과 깊은 계곡 그 사이사이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전답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차지하고 싶은 영토이자, 오랜 동안 긴장감이 넘치는 국경 지대이며 양국의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이었다. 유럽의 프랑스와 독일이 서로 탐을 내어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며 여러 차례 국적이 바뀌는 어려움을 겪었던 요충지인 프랑스의 알자스(Alsace) 지방처럼 그만큼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홉산은 역사적으로는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갈라놓았던 산이었지만, 서동과 선화 공주가 서로 간에 매혹되어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장소이었지만, 700여 백제 유민들의 처절한 죽음을 기억하는 산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극적인 이미지를 자신이 지닌 모든 과거를 거창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거창의 병풍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있는 산이다. 그래서 아홉산은 거창 사람들이 제집 마당에서, 집 앞길에서 고개를 들고서야 제대로 볼 수 있는 산이다.
[아홉산의 자연과 생태]
남북으로 길게 뻗은 아홉산의 남쪽 끝자락이 거창 분지를 가로지르며 위천천에까지 와 닿은 까닭에, 거창읍 도심은 아홉산 자락의 언저리에 놓여 있다. 도심 가까이 해발 572m[건흥산]의 꽤 놓은 산이 솟아 있음에도 풍경을 압도하지 않는 것은 거창 분지가 덕유산 주능선에 기대어 있는 내륙 침식 분지이며 이미 해발 200m에 이르기 때문이다.
아홉산이 북에서 남으로 내리 뻗어 위천천과 만나는 곳이 건계정이다. 심산의 계곡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급경사의 암벽과 바위틈에서 자라는 소나무숲 그리고 하천 바닥의 너른 바위들이 어우러진 멋진 경관을 이렇게 도심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멋진 경관을 빚어낸 위천천은 서쪽에서 발원해서 동쪽으로 흘러 아홉산 끝자락과 만나고 그대로 서쪽으로 흘러 거창읍을 지나가는 서출 동요(西出東搖) 형태이다.
아홉산의 생태적 다양성은 도심 안에 위치한 산에서는 보기 힘든 매우 놀라운 것이다. 특히, 산정 습지와 계곡은 그 자체로 수서 곤충과 갑각류, 양서-파충류의 서식처가 되기에 생태적 다양성에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산정 습지와 계곡의 원천이 되는 산성 아래 샘[약수터]의 수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위천천을 수원으로 하는 평지의 지하수층이 그 압력으로 400m 가까운 표고차를 뚫고 올라왔다고 보기 힘들고, 산성 위쪽의 산체에 함양된 지하수가 공급된다고 보기에는 산체의 규모와 범위가 작다.
더구나 아홉산에 물이 솟아나는 샘은 8부 능선 이상에서 이곳을 포함해 최소 3곳 이상이다. 이 정도의 수량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에는 아홉산의 샘 위쪽 산체는 작다. 결국 아홉산도 덕유산으로부터 지하수를 공급받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홉산이 독립된 산이 아니라 덕유산에서부터 쭉 이어져 내려온 내부 곡지의 하나이며 지맥을 따라 덕유산을 포함한 북부 고지대에서 함양된 지하수가 덕유산-호음산-아홉산 산체로 흐르고 있어 보인다.
[아홉산의 슬픈 사랑 이야기, 선화 공주 설화]
‘로미오와 줄리엣’은 500년 전의 이탈리아의 민간 설화였다. 지금 세계인들이 기억하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도 이 설화를 근거로 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순수 창작이 아니라 구전 설화에서 내용을 따 작품으로 완성한 것으로 그 원천에는 설화가 있었던 것이다.
‘선화 공주 이야기’는 1,400년 전 아홉산에서 전해져 내려온 설화로 소구력이 더 뛰어나다. 서동요로 인해 궁중에서 쫓겨난 선화 공주는 서동 왕자를 만나기 위해 백제로 떠나지만, 국경인 아홉산 취우령을 넘다 결국은 서동 왕자를 만나지 못하게 죽게 된다는 이야기는 영승 마을과 아홉산 취우령을 배경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취우령(驟雨嶺)의 의미 또한 ‘비를 취한다’는 뜻으로 선화 공주의 죽은 넋이 눈물이 되어 뿌려지는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니 영승 마을은 선화 공주의 애틋한 이야기와 남다른 사연을 가지고 있다.
‘선화 공주 이야기’의 발원지는 마리면 영승 마을이다. 이 마을의 옛 지명은 ‘영송(迎送)’이다. 서동 왕자가 신라로 넘어갈 때 이곳에서 보내고 맞이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지고 있다. 아홉산 국경을 경계로 백제의 첫 마을이 바로 영승이다. 1,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구전되어 거창의 보물이 된 그 발원점이 바로 영승 마을이고 처음으로 채록된 곳도 바로 영승 마을이다.
독특한 점은 거창의 선화 공주 설화는 여타의 선화 공주 이야기와 다르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같지만 이야기의 결말도 다르고 최근 밝혀진 미륵사 사리탑봉안기의 기록으로 인해 선화 공주의 존재가 통째로 부정되기에 이르렀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과 선화 공주가 주인공이지만 거창 지역의 선화 공주 설화는 기존에 알려진 서동요와는 전혀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다. 서동요에서 평민에 불과했던 서동은 선화 공주를 얻어 백제 왕이 되지만 거창의 선화 공주 설화에서의 선화 공주는 취우령에서 눈물을 뿌리며 죽음을 맞이한다. 왜 그럴까? 설화는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면서 지역에 따라 이야기가 약간씩 변형된다. 왜 이야기는 지역마다 문화마다 달라지는가?
이야기를 변형시키는 요인은 지역민의 문화와 삶이다. 서동 설화의 주인공 선화 공주는 미륵사를 창건하는 한 왕국의 왕비지만 아홉산의 선화 공주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야기를 조정하는 배경에는 지역 특유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백제와 신라 시대의 국경 지역이었던 거창 지역의 지역 감수성이 그대로 이야기에 녹아난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시대를 두고 전 인류에 회자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랑의 비극’일 것이다. 선화 공주 설화 역시 적대국이었던 백제와 신라의 화평을 바라는 백성들의 갈망이 투영된 것으로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국 동반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는 배경에는 두 집안 간의 오래된 적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 역사적으로 오랜 갈등은 전쟁을 낳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피지배계층인 백성들이 감수해야 할 몫이 될 수밖에 없어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어 삶은 피폐해진다는 것이 증명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설화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사랑과 평화를 갈구하는 염원이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영승 마을 주민들은 마을에서 구전되고 채록된 ‘아홉산 선화 공주 설화’가 이야기와 기록으로만 남아 있을 게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 함께 할 수 있어야 된다며 마을 주민 스스로 ‘아홉산 취우령 제례 위원회’를 구성한다. 매년 4월 마지막 주에 마을 주민들과 이웃이 모여 ‘선화 공주를 추념하는 아홉산 취우령제’라는 이름으로 고유제와 제례를 지내 1,400년에 이르는 소통의 통로를 만들고 있다.
거창 출신 원로 문인 신중신 시인은 선화 공주 설화를 소재로 「선화 공주님은」이라는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선화 공주님은
선화 공주님은 세간* 소문에
“와들 이래캐쌌는지요?”
고운 눈썹을 찌푸리고는
애써 울먹임을 감추더랍니다.
우리의 선화 공주님은
“내가 머 어쨌다고예?”
중치가 막히는지 그만
말문 닫고 돌아앉았다 합니다.
천 년하고도 한 사백 년 더 전
너무 예뻐 달밤 연꽃도 고개를 돌린다는
선화 공주님, 여태껏
뜬눈으로 하얗게 날을 새운답니다.
* 선화 공주가 믿는 불교에서 ‘세간’은 ‘유정(有情)한 중생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뜻한다.
[아홉산의 처절했던 전쟁 이야기, 거열성 전투]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 본기 663년(문무왕 3)의 기록에 의하면 “봄 2월에 흠순과 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을 공취하여 700여 급을 참수하였다[三年春二月欽純天存領兵攻取百濟居列城斬首七百餘級].”라고 한다. 백제는 660년 7월 13일 나당 연합군에 의해 사비 도성이 함락당했고, 19일에는 웅진성으로 탈출했던 의자왕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조국을 되찾기 위한 백제 부흥 운동이 8월부터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642년(의자왕 2) 이후로 거창은 백제 영역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거열성은 백제 부흥 운동의 전초 기지가 되었다. 거창이 한때 백제 영역에 포함되었다는 증거는 역사 기록뿐만 아니라, 거창 지역에서 출토되는 삼족 토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발이 세 개 달린 삼족 토기는 백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토기다.
기세를 떨치던 백제 부흥 운동은 663년에 접어들면서 세력이 표나게 약화되어 갔다. 신라군은 지금의 경상남도 서부 방면으로 대규모 공세를 시도했다. 그 해 2월에 접어들면서 거열성[거창]과 거물성[남원], 그리고 사평성[구례]이 차례로 함락되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거열성을 공략한 신라의 장수는 흠순과 천존이었다. 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으로 황산벌 전투에 출정한 경험이 있는 맹장이었다.
음력 2월은 봄이 시작되는 계절이지만 산정엔 겨울 동안 쌓인 눈이 녹지 않은 쌀쌀한 날씨였다. 성을 지키는 부흥군과 주민들은 신라군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였다. 거열성 발굴 과정에서 가공된 둥근 돌멩이[석환]가 많이 나왔다. 성을 지키는 사람들이 외적의 침입을 격퇴하기 위해서 마련한 돌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수적으로 우세한 신라군이 결국 성을 함락시켰다. 흠순과 천존의 명령에 의해 평지가 많은 남쪽 건물지 앞에서 포박된 백제 부흥군에 대한 처형이 시작되었다. 무려 700여 명이 참수되는 참극이 일어났다. 이른 봄 거열성 산골짜기에는 처절한 비명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거열성이 함락당하자 부흥군 일부는 북문[건흥산 정상에 위치]을 통해서 취우령으로 후퇴하여 덕유산을 타고 육십령을 넘었다. 백제 부흥군의 요새였던 남원의 거물성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뒤따라온 신라군은 거물성과 사평성[구례]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또 덕안성이 함락되면서 1,07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