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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였던 시기 달성군의 역사. 1910년(순종 4)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었다. 조선 총독부는 총무·내무·탁지·농상공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으며,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에 상주할 수 있는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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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독립을 위하여 전개된 민족 운동. 한말 달성군은 근대 자주적 국민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대구에서 펼쳐진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와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 1907년 대동 광문회와 현풍군 단연 보상회(玄風郡斷煙報償會)를 통해 국채 보상 운동, 1908년 대한 협회 대구 지회 등을 통해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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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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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농민이 권익 옹호를 위해 조직적으로 전개한 사회 경제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한 일제의 농업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달성군의 농민 운동은 1921년 10월에 가창면의 지이달(池二達), 서대수(徐大洙) 등이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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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어났던 청년들의 사회 운동.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에서 청년 운동은 민족 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념의 수용과 전파의 주체로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청년 운동은 근대 문명의 수용과 전파를 통해 청년층의 자각을 일깨우면서 문화 운동을 펼쳤다. 1920년대 중반의 청년 운동은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청년층의 계급적 인식을 부각시키며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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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 개항기 신분이 해체되는 가운데 1894년 농민 전쟁에서 농민군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 했고, 이것이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의 법적 철폐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회 관습으로는 여전히 신분 차별이 지속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백정의 자제에 대해 학교 입학을 제한한다든가 해서 기회의 균등은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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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중 일 전쟁 이후 달성군에서 조직된 관변 군사 후원 단체. 7군 연맹(七郡聯盟)은 일제가 1937년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펼치면서, 달성군 등 7개 부, 군에 군사 후원을 위해 만든 관변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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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단체. 가창면 농업협동회는 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지이달(池二達), 서대수(徐大洙) 등을 중심으로 소작인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농민 단체로서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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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가창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가창소작인조합(嘉昌小作人組合)은 1923년에 결성되었다.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계승하고 있는 농민 운동 단체이다. 1923년 지주 서우순에 대한 투쟁과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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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3월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지식인 문화 운동 단체.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는 1913년 3월 달성 친목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내외 청년 지식층을 규합하여 조직되었으며, 문화·학술 활동을 중점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달성 친목회가 추구한 독립운동의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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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 설치 되었던 소방 조직체. 1939년 7월 3일 「경방단 규칙」을 제정·공포하고 소방조와 수방단을 해체하여 경방단(警防團)으로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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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소농을 대상으로 한 공제 조합. 권농공제조합(勸農共濟組合)은 일제가 소농(小農)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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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논공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논공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4년 소작권 반환 투쟁,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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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경 대구 달성 지역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사회 운동 단체. 1925년경 달성군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가 설립되었으며, 부사장에는 이학술, 총무는 손사준이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사회 관습으로는 신분 차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차별적인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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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청년 운동 단체. 달성군 청년연맹의 결성은 조선 청년 총동맹의 조직 방침을 적극 수용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대구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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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노농 운동 단체. 1920년대 대구의 대표적 노농 운동 단체로서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조직화시켜 농민 운동을 지도하였고, 대구에서 직업별 노동 운동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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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달성군 화원면에 설립된 신간회 대구지회의 분회. 신간회 대구지회 화원분회는 신간회 대구지회의 활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달성군에 설립된 항일 민족 협동 전선 운동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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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본인 가도민랑이 설립한 사회사업 단체. 조선부식농원(朝鮮扶植農園)은 농업을 통해 조선 농민의 자활과 독립을 꾀한다는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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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해안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해안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5년 지세 반환 운동과 지세 불납 운동을 벌이고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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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소년 운동 단체. 1925년에 현풍소년회가 창립된 것으로 보이며, 1925년 소년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등 소년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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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현풍 지역의 청년 운동 단체. 1930년 5월 현풍 청년회가 현풍 청년 동맹으로 조직체를 변경하여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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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결성된 청년 운동 단체. 현풍청년회는 풍기 개량과 노동 야학 운영 등을 중심으로 실력 양성론에 입각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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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화원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화원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4년 추수 태업 투쟁과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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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항일 투쟁을 목표로 비밀 결사를 조직한 사건. 1928년 4월 하순부터 신간회 대구 지회의 노차용·장택원·정대종 등은 대구 시내 문상직의 하숙에서 만나 신간회나 근우회에서 야학이나 강연회 같은 수단으로 민족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직접적인 무력 투쟁 방략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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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달성군 수성면 주민 300여 명이 가창면 순사주재소를 습격한 사건. 1922년 6월 수성면 주민이 가창면 소재의 초장(草場)에서 풀을 베다가 그곳을 지나가던 일본인 순사 야마모토[山本]로부터 민족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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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26일과 28일에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인천 채씨 문중이 펼쳤던 만세운동.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3·1 만세운동은 지속적이고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달성을 포함한 대구에서는 3월 8일·10일·30일, 4월 15일·26일·28일 등 총 6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중 3월 8일과 10일은 기독교계와 학생, 3월 30일은 불교, 4월 26일·28일은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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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전개된 관공리 대상 독립운동 권고 활동. 3·1 운동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 살고 있던 김달문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부당하다고 인식하며,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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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상북도 달성군 각 면의 소작인들이 일으킨 소작권 반환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한 일제의 농업책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달성군에서는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필두로 1925년에 이르기까지 각 면 소작인 조합이 결성되면서 지세 불납 투쟁과 소작지 반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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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6월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총후 봉사 활동을 내세우며 조직된 친일 전시 동원 선전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달성군 연맹. 일본은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동원과 협력을 능동적으로 강제할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38년 6월 중순경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운동의 추진 목적은 “황국이 영원히 융창할 기초를 공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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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성서면, 유가면[현 유가읍] 주민들이 식민 지배 당국을 대상으로 한 자치 요구 투쟁. 일제 강점기 식민 권력은 조선에 일방적인 식민 지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군민들은 경제적 이해나 면장 임명 등에 있어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여 지방 통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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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달성친목회 결사 운동. 달성친목회는 1908년 대구에서 계몽운동 단체로 결성되었다가 한 일병합으로 활동이 중지된 것을 1913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재건된 비밀결사였다. 대한광복회[대한광복단]와 함께 1910년대 국내 대표적 비밀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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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달성 군민이 참여한 대구 독립 만세운동.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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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일제의 한 일 병합 이후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를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는 1918년 4월 무렵 김영순이 중국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유동열(柳東說)을 만나 조선 독립을 위해 청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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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이 전개한 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한용운을 비롯한 불교계 지도자들의 3·1 운동 참여는 중앙 학림[현 동국 대학교] 학생들에게 이어졌다. 중앙 학림 학생들은 조직적으로 각자 연고가 있는 지역의 사찰로 내려가 선언식을 거행하고 만세운동을 주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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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 당시 대구광역시 중구 대명동[옛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1919년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서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같은 시각 파고다 공원에 모인 5,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확산되었다.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에서는 3월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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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서영균, 송정득이 참여한 신흥학교 학우단이 펼친 독립운동. 신흥학교 학우단의 정식 명칭은 신흥 학우단(新興學友團)이다. 신흥 학우단은 1913년 3월 만주 류허현[柳河縣] 산위안푸[三源堡] 다화셰[大花斜]에서 창설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주로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1913년 7월부터 국문 또는 국한문으로 발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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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출신의 유림들이 참여한 유림단의 독립 청원 운동. 1919년 3·1 운동의 독립 선언서 서명에 참여하지 못했던 유림계는 국제 활동의 사명은 유림에서 맡아야 한다고 인식하고,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 여론을 조성하고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남 지역의 유림을 대표하는 곽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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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이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의열단은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 및 그 관련 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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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8일 김종철(金鍾喆)이 일본 경찰 가이[甲斐]를 살해하고 탈출한 사건. 일제 강점기 국외에서는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자금과 독립운동가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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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일본 유학생 이용로가 상해 임시 정부 수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으킨 운동. 3·1 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에 조직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민족 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서 임시 정부의 수립이 추진되었다. 임시 정부 수립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하였다. 이때 이용로는 임시 정부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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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 교토[京都]에 위치한 시마무라[島村] 토공 회사에서 발생한 한국인 노동자 항일 독립 투쟁 사건. 1941년 6월 일본 교토에 위치한 시마무라토공회사의 노동자인 김말도(金末度)[1924~1969]는 같은 공장 노동자인 이상문(李相文)·전경원(全京元)·윤성택(尹成澤)[1926~1957]·김석용(金碩用) 등과 함께 항일 독립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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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1925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즉각적인 독립 전쟁은 어려우니 장기적인 독립 전쟁 전략을 구상키로 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열하(熱河)나, 찰합이(察哈爾) 등의 황무지를 구입,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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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우쑹[撫松縣]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 부속 기관인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 사건. 흥업단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즈음 중국 푸쑹[撫松]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 부속 기관이었다. 흥업사에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이만준(李萬俊)이 가입하여 회계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이후 5월 말까지 경상북도 달성군 무태 출신 이시영(李始榮), 전라북도 익산 출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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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유림단의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낸 독립 청원 운동.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과 1919년 2월 친일 세력과 경성의 일부 친일 유림이 야합하여 합방 절대 지지 한일 불리 청원서(合邦絶對支持韓日不離請願書)를 일왕에게 보내려던 음모가 폭로되면서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달성군에서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한 독립 청원 운동이 독자적으로 진행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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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보통학교. 일제의 교육 방침은 1911년에 공포된 「조선 교육령」에 잘 나타나 있다. 핵심 내용은 이른바 충량(忠良)한 제국 신민(臣民)과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실용적인 근로인·하급관리·사무원 양성하는 것이다. 또 보통학교는 "보통의 지식·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日語]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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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즈음인 1940년에 대구 사범 학교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 무우원(無憂園)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고, 폭력적인 투쟁이 아닌 문화·경제적인 힘을 길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무우원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자, 유태인처럼 경제의 힘을 길러 적을 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