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지켜 온 전통 신앙, 거창 당동 당산과 마을 신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1384
한자 千年-- - 傳統 信仰, 居昌 堂洞 堂山- - 信仰
영어공식명칭 It has kept the traditional beliefs of thousands of years geochang dangdong dangsan
이칭/별칭 당동 당산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태성

[정의]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당동 마을에 있는 동제당으로 고대 제의의 흔적을 간직한 민속 및 민간 신앙의 중요한 자료.

[개설]

거창 당동 당산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사병리 당동 마을에 있는 동제당이다. 1997년에 경상남도 민속 문화재 제21호로 지정된 민속 및 민간 신앙의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당동 당산은 삼국 시대부터 전해지는 당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산제 역시 고대 제의의 흔적을 잘 간직하고 있다.

[거창 당동 당산제의 현황과 개관]

거창 당동 당산거창군 가조면의 북쪽에 있다. 가조면은 거창군의 동부에 위치하며 합천군의 가야면과 맞닿아 있다. 가조면장군봉-의상봉-우두산[1,046m]-비계산[1,126m]-두무산[1,036m]-오도산[1,134m]-숙성산[898m]-봉화재-박유산[712m] 등의 높은 산맥에 둘러싸인 전형적 분지이다. 가조면에는 옛날 가소(加召)라는 성읍국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신라 때에는 가소현, 함음현이라 불렸다. 고려 시대에는 가소현, 거제현이라 하다가 조선 시대 초에 제창현이라 하다가 거창현에 합쳐졌다.

이들 산줄기 중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산은 북쪽을 둘러친 우두산이다. 우두산은 일본의 창세 설화와 연관이 있다는 설들이 있으나 불명하다. 우두산 아래에는 사병리(士屛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사병리에는 병산, 창촌, 당동의 세 마을이 있다. 그중 당동(堂洞)당골[堂谷]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지명은 마을 서쪽 언덕 한가운데 삼국 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당산이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당동 마을에는 현재 밀양 박씨 일부와 함양 오씨들이 살고 있다. 밀양 박씨는 원래 원당골에 살다가 옮겨온 것이다. 원래는 함양 오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후 함께 살게 되었다. 1976년에 당동 마을은 약 50가호 159명이 살았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현재도 가호 수는 거의 변함이 없으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한집에 한두 명 정도로 약 40명이 조금 넘는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고령이고 젊은 사람을 구경하기는 매우 힘든 정도이다. 주민들의 구성도 대부분 60세 이상의 부녀자들이며 남성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다. 원래는 논농사와 밭농사를 위주로 생업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기계로 하는 논농사만 겨우 유지가 되고 밭농사는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로 규모가 줄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분지 쪽에서는 딸기와 복수박 등 특용 작물을 하는 집들이 많다.

이 마을 서쪽에 약간 높은 구릉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있는데 그 가운데 당산목과 당집이 있다. 이곳을 당동 당산이라고 한다. 당산의 형태는 사방이 각각 한 칸으로 정면 2.53m, 측면 2.57m, 용마루 높이 2.95m, 처마 끝 높이 1.6m의 흙담집이며, 지붕은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 형태다. 당집 옆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당집 앞의 나무문을 열고 들어서면 뒷벽 가운데에 널빤지로 선반을 가로질러 놓았다. 그 위에 위패와 상량문이 놓여 있고 촛대와 제기, 마른 제물 등이 그 앞에 진설되어 있다. 위패는 오래되어 글자를 쓴 먹이 바래서 잘 알아볼 수 없으나 상량문을 고려하면 후토지신(后土之神)이라 쓴 것으로 추정된다.

[유래와 변천]

유래에 관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1858년에 오조영(吳祖英)이 기록한 「중수 탕산 후토사 상량문(重修碭山后土祠上樑文)」에 따르면 이 당산은 원래 가조현(加祚縣)[신라 경덕왕 대~조선 세종 대]의 사직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조현이 폐지된 뒤에 사직당의 신을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고 마을 이름을 ‘당동’으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유서가 깊은 제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있는 「당사 중건기(堂舍重修記)」를 그대로 옮겨 보자. “『거창군지』에 의하면 가조 당동촌 서쪽 산기슭에 가조현 사직당이 있는데 신라 경덕왕 때 지방의 수호 당산으로 삼고 봄가을에 치성을 드렸다. 가조현이 폐지된 이후 당동의 사람들이 매년 정월 보름에 제례를 드리며 풍년과 백성의 평안을 빌었다. 또한 9월 9일에 새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다. 월파(月波) 오조영(吳祖英)의 중수 상량문(重修上樑文)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어서 말하기를 신라 시대에는 가조가 가소성의 중심지였으니 당사(堂祠)는 성(城)의 수호신을 봉안한 소도 지역(蘇塗地域)으로 신성시 되다가 신라 경덕왕가소현이 함음현(咸陰縣)이라 개칭되면서 지방 수호신을 모신 곳으로 전락하여 황폐해진 것을 조선 영조 때 월파 오조영과 일제 때 송포(松圃) 오병권(吳秉權)께서 동민의 뜻을 모아 중수하였으나 근년에 오랜 세월과 풍우(風雨)로 인하여 다시 비가 새고 기둥이 부패하여 동민의 마음을 몹시 안타깝게 하던 중 신미년(1997)을 맞이하고 이장 오석찬(吳錫贊)이 중심이 되고 동민의 당동 수호심(守護心)이 결집되어 일대 중건 사업이 진행되어 얼마지 않아 완성되었다. 이에 동민들은 오랫동안의 근심이 사라지고 비로소 안도할 뿐 아니라 기쁘고 든든한 마음으로 당사(堂祠)를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은 매년 1월 길일(吉日)에 동민의 안녕과 소득 증대 및 후진의 영광을 축원하는 뜻으로 전 동민의 참여 속에 경건한 제를 올리고 있다. 이것은 원시 시대부터 지금까지 전해 오는 우리의 고유 신앙이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여서 현재에 이르고 있는 정신적인 유산인 동시에 현대를 살고 있는 동민들의 마음의 귀의처가 되고 있다. 신이여 부디 이 간절하고 정성어린 동민의 뜻을 기쁘게 살피시어 언제나 안녕과 영광을 내려 주옵소서. 신미년(1997) 10월 일 오환숙(吳煥淑) 지음, 오금숙(吳金淑) 씀.” 이처럼 현재 남아 있는 중수기는 1997년 10월에 작성한 것으로 비교적 근래의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당동 당산의 모습은 원래의 모양을 잘 간직하고 있기는 해도 근래에 다시 만든 것이다.

한편 1859년 오조영이 쓴 중수기의 일부를 살펴보면 “[전략] 매년 정월 초하루에 좋은 날을 정하여 치성을 드렸다. [중략] 이미 향화(香火)를 받듦이 있는데 어찌 묘당을 만들지 않겠는가. 지금에 이르러 다시 짓는 공역이 있으므로 [원래] 돌로써 기둥을 만들어 완성하였으니 진실로 무궁할 것이나 혹 허물어지는 환란이 생길까 두려워하여 기와로써 풀을 대신하였으니 광채가 배로 증가되었다. 토목 공사가 끝나고 새로 화려한 편액을 걸어 해의 정려함이 아니라도 역시 정밀하다. 곧 위로 장군봉이 둘러쳤고 아래로는 박유산을 누르는 인순함이 있다. 서쪽으로는 금귀봉을 당기로 동으로는 문수봉에 임한다. 이에 신사를 맺어 후토(后土)라고 이름을 걸고 가조 일백여 리를 둘러 돌아 당동 십실과 다른 마을을 옹호하여 비바람은 순조롭고 신은 령이 있어 천백 년에 불리어진다. [하략] 함풍 8년 무오 2월 12일 월포 오조영 근헌.”이라 되어 있다. 또한 뒷면에 “광서 4년 무인 8월 5일 기와를 복귀하고 담을 수리하여 문을 걸고 경계를 정하여 □□를 다스린다. 치성 일자는 매년 정월 초3일로 정하고 변고가 있으면 날을 받아 정하라.”는 구절이 있다[『거창군의 마을 신앙』, 거창 문화원, 2014].

이러한 내용을 토대로 볼 때 가장 오래된 기록은 원래 당동 당산이 돌기둥 흙담에 초가지붕으로 있었으나 이것을 1859년에 기와지붕으로 바꾸었고, 광서 4년(1878)에 기와와 담을 수리하고 문을 달고 주변에 경계 표시를 하였으며, 1997년에 다시 보수하였다. 제를 지내는 날짜도 원래는 정월 초하루에 길일을 정하여 지내다가 매년 정월 초사흘로 고정하고 변고 시에만 다시 날을 잡았으나 1997년 당시에 다시 정월 길일에 제를 지내는 것으로 되었으며 최근에는 정월 대보름(15일)에 제를 모시는 것으로 고정된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이 전하는 말들도 이와 비슷하다.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으나 중수할 때에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소나무를 심었다.

[당산제의 준비와 진행 순서]

당산제를 지내는 순서를 차례로 정리해 보자. 1) 섣달 말에 동민들이 모여서 동민들 중에서 변고가 없고 생기복덕이 있는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한다. 1-1) 이날부터 제관은 초상이나 다툼 등 부정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않고, 부부 관계도 맺지 않으며 매일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정신을 정갈하게 한다.[최근에는 가조면장이 제관이 된다.] 1-2) 마을 사람들도 복을 받으려는 사람들은 남몰래 목욕재계하고 부정을 멀리한다. 2) 동시에 제를 지내는 날을 정월 초의 길일로 택한다.[정월 초사흘 혹은 길일로 정하다가 현재는 정월 대보름날로 고정.] 3) 동제일이 정해지면 바로 그날로 마을 입구와 공동 우물, 그리고 동네의 집집마다 금줄을 치고 대문의 좌우에 황토를 한 무더기씩 놓고 부정과 잡신을 쳐낸다. 3-1) 금줄은 새로 나린 짚으로 꼰 새끼줄을 사용하는데 왼쪽으로 꼰 것이라야 하며 이때 흰 천을 섞어서 꼬기도 하고 금줄에 흰 천을 달기도 한다. 3-2) 황토는 마을 뒷산 쪽 깨끗한 곳을 골라서 새롭게 파낸 잡티가 없는 붉은색 흙을 퍼 와 사용한다. 4) 동제일 하루 전에는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있는 마을의 위쪽과 아래쪽 두 곳의 공동 우물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아주까리기름으로 불을 밝힌다. 4-1) 그날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개들은 집의 마루 아래에 넣어 짓지 못하게 한다. 5) 제물은 돼지머리와 건어물, 맷밥 등을 사용하였으나 요즈음은 점차 유교식 제사상과 비슷하게 과일이나 기타 과자와 같은 제물이 더 사용된다. 제물은 가장 좋고 흠이 없는 것으로 택하여 고르며 가격은 흥정하지 않고 달라고 하는 대로 준다. 그리고 매년 새로운 제기를 사용한다. [최근에는 대추, 밤, 감, 배, 사과, 수박 등 과일과 떡, 가오리, 문어 등도 함께 진설되며 거창의 일반 유교식 제사상과 비슷하게 변해 간다.] 6) 제일의 시작은 첫 시인 자시에 시작되는데 이때 제당으로 이동하여 자정에 제를 올린다. 7) 동제당 앞마당에서 장닭의 목을 베어 피를 사방에 뿌리고 닭의 목을 당집 앞 땅에 묻는다. 원래는 돼지를 잡아서 그 피를 사방에 뿌렸다고 한다. [최근에는 통닭으로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7-1) 이러한 의례는 당제를 지내기에 앞서 가조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신들 즉 장군봉·금귀봉·박유산·문수산에 있는 사방의 산신들에게 먼저 희생 제물을 올리고 난 다음에 마을 제를 지내는 것이다. 이러한 산신제는 사직당 때의 유습이라 한다. 8) 당집에 새 제기 위에 닭·쌀·건어물·과일 등의 제물을 차리고 조용히 유교적인 제례를 드리는데, 강신, 전체 재배, 단잔 헌작, 제관 제배, 축관 독축, 헌작한 술을 삼분하여 부어 내고 잔을 그 자리에 올림, 전체 제배, 낙시(落匙) 후 제배, 소지를 사르고, 제관과 제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먼저 음복한다. 9) 날이 밝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복하고 당산 주변에 지신밟기를 한 뒤 마을 중요한 곳과 각각의 집으로 돌아가며 지신밟기를 한다.

[토지신을 모시던 원시적 제의 모습을 잘 간직한 당산]

당동 당산은 삼국 시대 이래로 있어온 당산이라 전해지고 그 기능은 사직당(社稷堂)이라고 한다. 사직단(社稷壇)은 주로 백성들이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토지신과 곡물신에게 드리는 제사이므로 각 지방마다 사직단이 있다. 즉 사직단에서 제사를 드리는 대상인 사직은 토지를 관장하는 사신(社神)과 곡식을 주관하는 직신(稷神)을 가리킨다. 당동 당산의 원시 제의적 특성은 당산 주변에 당산의 크기에 비하여 상당히 넓은 영역의 돌담이 둘러쳐진 것이다. 원래 상당히 넓었는데 지금은 좁아졌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현재 당동 당산 둘레의 담과 그 이전에 있던 넓은 영역을 표시하는 담이 두 겹으로 있었다고 전해 왔다. 이는 원시 제의를 주관하는 신성 지역인 소도의 영역을 표시하는 것과 같다. 또한 당동 당산에 돌로 기둥을 세웠다는 기록은 원시 제의에서 땅 위에 거석(巨石), 즉 기둥 모양의 큰 돌을 세워 신을 경배하는 것과 같은 형식이다. 그리고 이 돌은 하늘과 땅, 지하 세계를 연결하는 우주목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동 당산제가 원시성을 띠는 세 번째 이유는 당산제에서 희생을 쓰는 것이다. 당산제에서 돼지나 닭의 피를 사방의 땅에 뿌리고 그 머리를 땅에 묻는 것이 곧 원시 제의의 모습이다. 이러한 거창 당동 당산의 당집과 주변의 담장 등의 형태와 제의 과정 및 제의 형태는 고대 희생 제의의 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는 매우 소중한 민속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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